UPDATED. 2024-04-07 22:52 (일)
[프리덤 논단] 베른슈타인과 룩셈부르크의 수정주의 논쟁
[프리덤 논단] 베른슈타인과 룩셈부르크의 수정주의 논쟁
  • 프리덤뉴스
  • 승인 2022.06.2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지피지기 – 베른슈타인과 룩셈부르크의 수정주의 논쟁

최태열(프리덤뉴스 논설위원) 

 

좌파의 이념논쟁 중 베른슈타인과 룩셈부르크의 수정주의 논쟁에 대한 이해는 좌파와의 이념전쟁을 치르고 있는 우파진영의 활동가로서는 놓칠 수 없는 중요한 과제이다.

 

좌파를 마르크스가 제시한 공산혁명노선만 따르는 단일노선으로 보아서는 안되며 그들 내부에서도 치열한 이념논쟁을 거쳐 베른슈타인과 같은 중도좌파가 오늘날 다수를 점하게 된 역사적 과정을 이해하여야 한다.

 

베른슈타인(1850-1932)의 생애는 마르크스 추종기와 비판기의 두 시기로 나눌 수 있다. 22세(1872년)때 독일 사회민주당에 입당하여 사회주의자로 출발하였고, 엥겔스와의 만남 이후 31세(1881년)부터 9년간(1890년까지) 사회민주당의 기관지인 ‘사회민주주의자’의 편집장으로 활동하였다. 그 동안에는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창안한 공산주의에 충실한 추종자로서 자본주의체제를 뒤엎는 공산혁명을 신봉하였다.

 

영국에 망명해 있는 동안 페이비언사회주의자들과 교류하면서 마르크스의 공산혁명노선에 대한 비판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1895년 엥겔스의 사망 이후 마르크스의 공산혁명노선에 대한 비판을 본격화하면서 소위 수정주의노선의 대표적 이론가가 되었다. 베른슈타인은 억압과 착취가 없는 지상낙원의 건설이라는 공산주의의 궁극적 목표에는 동의하였으나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방법으로 마르크스가 제시한 폭력적 공산혁명노선에는 반기를 들었던 것이다.

 

베른슈타인은 마르크스의 자본주의에 대한 현황분석에 이의를 달았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발전함에 따라 소수의 대자본가에게 자본이 집중되면서 중간계층의 소자본가는 몰락하고 무산자들이 양산되어 공산혁명이 발생할 조건이 성숙될 것으로 전망하였다. 그러나 베른슈타인이 자본주의국가들을 살펴 보니 대자본가에게 자본이 집중되기보다는 소자본가들이 훨씬 많이 늘어나고 노동자들의 실소득도 증가하는 현상을 보게 되었다. 그에 따라 베른슈타인은 폭력적인 공산혁명을 추구하는 것은 현실에 맞지 않는 노선이므로 의회로 진출하여 점진적인 개혁을 추진하여야 한다는 주장을 펴게 된 것이다. 베른슈타인은 1896년부터 그러한 주장을 여러 매체를 통하여 공개적으로 펴다가 1899년 “사회주의의 전제와 사민당의 과제”라는 책자를 내면서 자신의 주장을 종합적으로 정리하였다.

 

베른슈타인의 그러한 노선에 대하여 그 당시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그를 수정주의자로 칭하면서 공식적으로는 그를 배척하였다. 독일의 사회민주당은 1899년과 1903년에 개최된 두차례의 당대회에서 수정주의를 거부하고 마르크스주의에 토대를 둔 기존의 혁명적 사회주의노선을 당의 공식노선으로 재확인하였다. 그러나 당은 강령상으로는 혁명적 사회주의노선을 표방하였지만 실제로는 제국의회 선거와 의회라는 활동무대를 더 중시하는 기만적 태도를 나타내었다.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노선에 대하여 가장 강하게 비판한 인물이 룩셈부르크였다. 룩셈부르크(1871-1919)는 폴란드 출신의 여성으로서 공산혁명가의 삶을 불꽃처럼 살았다. 룩셈부르크는 1897년 취리히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1898년 독일 사회민주당에 입당한 후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노선을 강하게 비판하는 글을 여러편 발표하였고 그것을 묶어서 “사회개혁이냐 혁명이냐(1899년)”라는 소책자를 발간하였다. 겉으로는 혁명적 사회주의노선을 표방하면서도 내부적으로는 개량주의적 노선을 중시하는 사회민주당에 반발하여 무장혁명노선을 지향하는 스파르타쿠스단에 참여하였고 독일공산당의 창건에도 관여하였다. 1919년 체포되어 호송되던 중 호송병에 의하여 살해되어 시체는 베를린의 운하에 버려졌고 4개월 후 수면 위로 떠올랐다.

 

룩셈부르크는 자본주의가 붕괴하지 않을 것이라는 베른슈타인의 형세 판단이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하면서 노동자계급의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혁명을 주장하였다. 룩셈부르크는 직업적혁명가로 구성된 당이 대중을 지도하면서 공산혁명을 이끌어야 한다는 레닌을 비판하고 대중의 자발성을 신뢰하면서 파업을 통한 혁명노선을 유지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룩셈부르크의 이런 대중의 자발성에 대한 신뢰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노선은 트로츠키의 영구혁명론과 이론적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룩셈부르크 사후 독일 좌파는 폭력적 공산혁명을 주장하는 공산당과 사실상 개량적 의회주의노선을 유지하였던 사회민주당으로 나뉘었으나 결국 히틀러의 나치즘에 의하여 둘다 몰락하는 과정을 밟게 되었다. 2차대전 이후 독일은 사회민주당이 정권을 잡으면서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노선을 따르게 되었고 서유럽 대부분의 국가들도 그 노선을 따랐다. 동유럽은 소련의 영향하에 공산주의국가들이 되었고 1980년대 말에 모두 몰락하고 말았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