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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집단 사망사고에 대한 국가책임론과 개인책임론
이태원 집단 사망사고에 대한 국가책임론과 개인책임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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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2.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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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집단 사망사고에 대한 국가책임론과 개인책임론

 

정병국(전 에티오피아 대사)

 

이태원 집단 압사사고는 국가가 책임져야할 사고라고 주장하면서 야당이 정부를 공격하고 있는 가운데 사망자들이 대부분 성년으로 개인에게도 책임이 있지 않느냐는 반론이 있다.

이와 관련하여 최근 이병태 교수는 본인 페이스북에 그들도 책임은 없었습니다 (책임과 수용)’라는 제목으로 일부는 이태원에 놀러간 본인들이 책임을 져야지 왜 국가책임을 추궁하냐고 합니다. 국가에 과도한 책임을 묻는 주장이 부당하다는 것은 맞는 말이지만 그렇다고 그곳에 가서 사고당한 "책임"이 개인에게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책임은 의도된 선택과 행동에 대한 결과에 대해 지는 본인의 도덕적 의무입니다. 하지만 그곳에 간 누구도 사고를 예견하고 사고 가능성의 위험 감수의 의식적 선택을 한 게 아니고 한 개인의 행동이 사고를 유발시킨 것도 아닙니다. 각자가 한 행동들의 우연이 겹쳐진 불행한 사고입니다. 이게 책임질 일이라면 성수대교 붕괴 사고 시 추락한 버스의 등교길에서 죽은 학생들도 책임질 일입니다. 세월호를 탄 것도 책임이 됩니다. 그 시간에 그 버스 선박을 탄 선택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누구도 그들에게 성수대교 세월호 사고의 책임이 승객에게 있다고 하지 않습니다. 세월호 수학여행도 놀러 가는 중이었습니다. 이태원 그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책임없는 불행을 수용하고 이겨내며 살아가는 것이지 모든 불행에 책임이 있지 않습니다. 중략 그 누구도 위험과 사고를 예상하고 한 행동은 없었습니다. 누구에게도 예고되지도 않았습니다. 예고 되었다는 우길 것이 아니라 예고되었어야 했는데 왜 예고가 안 되었을까가 우리가 던져야할 질문입니다.‘라는 글을 올렸다.

이병태 교수의 글에 대해서 민경국 사단법인한국자유주의연구회장은 이태원의 사고에 대해 개인이 책임져야 한다면서 개인들이 예측하기 어려운 그리고 의도하지 않게 당한 사건은 국가가 책임지고, 자유의지에 따른 행동은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논리는 모두 틀렸다고 반론을 제기하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민경국 회장은 만약 국가가 강제를 동원하여 개인들로 이태원에 집합하도록 했다고 한다면 그 압사사건에 대한 책임은 당연히 국가가 책임이 있겠지만 자발적으로 이태원으로 몰려가 서로 압사당했다. 참으로 슬픈 일이지만 개인에게 책임이 있다고 말하면서 이병태 교수의 글은 국가의 간섭주의만을 옹호하는 사람들을 증대시키는 역할, 더욱 심하게 말한다면 우리를 사회주의로 이끄는 글이다라고 비판했다.

헌법 제10조는 국민의 기본적 인권, 14조는 거주이전의 자유, 27조는 사생활 자유, 21조는 집회 등의 자유를 각각 보장하고 있다. 이러한 자유권들이 일종의 천부적 인권으로서 국가가 아니라 개인에게 주어져 있으므로, 그 권리들을 누리다 발생한 문제에 대한 책임도 당연히 해당 개인에게 있는 것다. 압사사고 전에 미리 각 개인들이 그 권리들을 국가에 돌려주기 라도 하였던가? 사실 헌법에 규정된 개인의 권리를 국가에 일시적으로라도 반납하는 것도 불가능할 것이다.

권리와 의무 또는 책임은 불가분일텐데, 권리가 없는 국가가 어떻게 그로 인한 책임을 진다는 것인가?

따라서 강제로 집합시키지도 않은 국가에 압사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민 교수님의 논리는 당연한 것이다.

필자는 자유주의자로서 아담 스미스의 <도덕 감정론>에 비추어 본다면 세월호나 이태원 집단 사망사고를 국가 또는 국민 전체에 연계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재난을 당한 사람들에게 그 재난을 경시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그들에게 가장 잔인한 모욕이 되지만(도덕 감정론, 1부 제1편 제2장 제4), 피해자가 동정을 얻기 위하여 끊임없이 탄식과 눈물로 큰 소리로 통곡하는 것도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역겨움을 느끼게 한다(lbid., 1부 제1편 제5장 제3).

인류는 다른 사람들의 재난에 천성적으로 동감 (sympathy)하지만, 방관자가 재난 당사자가 느끼는 정도로 강렬하게 동감할 수는 없다(lbid., 1부 제1편 제4장 제7).

세월호 침몰 사고, 이태원 압사 사고 같은 재난에 대하여 일면식도 없는 방관자인 전 국민에게 그 유족과 같은 정도로 애도하며 부조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인간 본성에 어긋나는 것이다.

슬픔의 완전한 공유는 서로 알지 못하는 수 많은 사람들로 구성되는 현대의 거대 사회에서는 특히 기대할 수 없다고 보아야 한다. 소규모 씨족사회에서나 가능할지 모르겠다.

최근 박인환 변호사는 팬앤 논평에서 20019.11 테러 사건 때에도 미국 연방 대통령이나 뉴욕 시장에 대한 비난이나 책임 전가는 없었다고 언급했다.

이와 비슷한 사례는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 작전 때 찾을 수 있다. 상륙작전 전날 그 지역 독일군 방위 책임 지휘관인 에르빈 롬멜 원수는 아내의 생일상을 차려주기 위하여 기차로 9시간이나 걸리는 울름(Ulm)으로 일시 귀향하였다. 그는 생일날 아침 앞치마를 걸치고 생일상을 마련하고 아내와 함께 지내고 있었을 때 부관으로부터 긴급 전화를 받고 부랴부랴 전선으로 복귀하였다.

원래 병력이 역부족인 독일군은 명장 롬멜의 활약에도 연합군의 상륙을 저지할 수 없었다. 평소 롬멜은 만일 연합군이 상륙하면 모래사장에서 해결해야 한다고 역설하며, 병력 증강을 군 수뇌부에 요청해오고 있었다. 그러나 히틀러와 군 수뇌부는 연합군이 영-불해협(Pas de Calais) 쪽으로 상륙작전을 펼 것으로 오판하여 그곳에 병력과 화력을 집중 증강 해 두고 있었다.

이에 독일 국민과 언론 그리고 그토록 잔인하고 가차 없는 히틀러와 군 수뇌부 등 그 누구도 아내 생일 파티 때문에 전선을 비웠다고 롬멜을 비난하거나 책임을 전가하지 않았다. 모두가 노르망디 상륙을 저지하지 못한 근본 원인은 롬멜 탓이 아니라고 인식하였던 까닭이다.

인재 또는 자연재해 때면 으레 누가 골프장에 있었다느니, 술자리에 있었다느니, 얼굴 꾸미고 있었다느니 하는 것을 큰 시비거리로 삼는 한국에서였다면, 롬멜은 어찌 되었을까?

 

정병국 박사 프로필

전 주 에티오피아 대사

문학박사

연세대 정치외교과

조지타운 대 외교대학원(비학위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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