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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처변불경의 처세
[시론] 처변불경의 처세
  • 프리덤뉴스
  • 승인 2022.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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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변불경(處變不驚)의 처세

 

변호사 김기수(프리덤뉴스 발행인)

 

벌써 6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다. 2016년 10월 말쯤으로 기억된다.

그 때는 여,야 정치권은 물론 소위 보수 식자층에서도 박근혜대통령에게 하야하라고 목청을 높였다. 법원도 백남기씨 부검영장을 발부하면서 유족과 합의하는 조건부로 인용하면서 그런 대열에 합류했다.

어떻게 국가 공권력의 집행여부를 자연인 개인의 의사에 맡긴단 말인가? 경찰은 법원의 조건부 영장을 부검영장집행을 포기하라는 뜻으로 알아 듣고는 부검영장 재청구는 포기했다. 이로써 체제를 수호해야 할 책무가 있는 경찰이 권력에게 등을 돌렸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말도 안되는 영장발부였다. 그렇게 대한민국의 법치는 땅에 떨어져 갔다. 

박근혜정권은 자진 하야의 길을 가느냐 아니면 국회의 탄핵소추를 기다리는냐를 선택해야 했다. 그 해 겨울은 그렇게 차갑게 다가왔다.

그 즈음 나는 답답한 마음을 달래려고 북한산을 등산하던 중 백남기씨 시신이 안치된 서울대병원 정문에서 부검을 주장하는 1인 시위가 시작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하산해서 1인 시위에 동참했다.

그 날 저녁 자변 정책위원장 도태우변호사가 청와대 앞에 꽃다발을 가져다 놓은 사진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나는 이 소식을 양동안 박사님께 전했더니 자신도 꽃을 전달하고 싶다는 전갈이 왔다. 

다음 날 오후 나는 경복궁역 근처에서 꽃다발 2개와 매직펜과 종이를 사고 양동안박사님을 기다렸다. 접선하듯 만난 우리는 어느 카페의 모퉁이에서 양박사님은 흰 종이에 '박근혜 대통령님 힘내세요' 나는 '박근혜 대통령님 사랑합니다'라고 각자 썼다. 그리고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기념사진을 몇 장 찍고 청와대 민원실에 꽃다발과 종이피켓을 전달했다. 그 때 같이 찍었던 내 사진은 어디 가고 없다. 하지만 양동안 박사님이 손피켓과 함께 꽃다발을 든 사진은 노컷일베(지금은 제호 분쟁으로 폐간)에 실렸고 며칠 만에 80만 뷰를 찍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때 바닥 민심은 그랬었다.

꽃다발을 전달하고 난 양박사님과 나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통인시장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허름한 백반집에 들어가서 막걸리 2통을 시킨 후 시원하게 한잔 들이키시더니 '처변불경 (處變不驚)'이라시며 '갑자기 세상이 바뀌더라도 절대 놀라면 안된다'고 말씀하셨다.

식사를 마친 그날 밤 양동안 박사님의 제안으로 우리는 영등포에 있는 에스더기도운동 교회로 갔다. 양박사님은 에스더기도운동측에 대중집회를 주관해줄 수 없는지 물었다. 에스더기도운동측에서는 기독교인이 정치적 대중집회를 개최할 수는 없지만, 일간지에 광고를 내고 서울역앞 구국기도회를 개최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실제 그 약속대로 서울역 미스바구국기도회가 성대하게 열렸고 천여 명의 신자가 차가운 날씨에도 예배에 참여했다. 그 집회에도 태극기를 배포하는 일을 나와 몇 사람이 맡아서 했던 기억이 난다. 그 후 양동안박사님은 기독교로 개종하셨고 차가운 날씨에 자주 집회를 다니다가 건강이 악화되기까지 하셨다고 들었다.

에스더기도운동측이 대중집회는 곤란하다는 입장을 확인하고 우리는 근처 카페로 옮겼다. 그 때 양동안박사님은 나에게 '촛불집회에 대항한 대중집회가 반드시 필요하다면서 김변호사가 그 일을 추진해 달라'고 신신당부하셨다.

나는 다음날 자변 정책위원장을 맡고 있던 도태우변호사와 강남역 내 사무실에서 만나 '체제수호를위한시민사회단체연석회의'개최하기로 합의하고, 회의소집통지문을 '바른교육권실천행동'명의로 300여명의 시민운동가와 단체들에게 메일과 문자를 보냈다. 개최장소는 바른사회시민회의 회의실로 정해서 공지했으나 바른사회측에서는 1시간 뒤에 장소를 대여해 줄 수 없다고 회신이 왔다. 그래서 종로 통일빌딩 애국시민연합 사무실로 정해서 재차 통지를 해야 했다.

날자는 기억나지 않지만 이 회의는 소위 아스팔트에서 운동을 하던 시민운동가 약 30명 정도가 모인 가운데 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는 박사모 신용표 부회장도 참가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회의를 통해 나를 포함한 이희범, 조영환 3인 공동대표로 한 '헌법수호애국시민연합'이라는 단체가 결성되었다. 박사모 명의로 집회를 주도해서는 효과가 반감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서였다. 드디어 2016. 11. 12. 토요일 여의도 국회의사당역 3번출구 앞에서 첫 집회가 개최되었다. 당시에는 예산도 없던 터라 김상진 애국시민연합 국민감시단장이 집회에 사용하던 빨간색 트럭을 무대로 사용했다. 이 집회에 박사모(정광용)측은 오지 않았다. 그 대신 울산과 부산, 대구, 포항의 박사모가족(회장 이희철) 회원 350명이 버스 10대로 상경해 집회에 합류했다. 그 덕분에 보수단체 회원 약 1천명이 운집해 태극기를 들고 집회를 개최했다는 소식을 연합뉴스가  '보수단체 하야반대 집회'로 짧게 보도한 바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기사를 찾을 수가 없다.

첫 집회의 사회는 양평 송만기 의원이 했다. 이희철 회장님은 거금을 들여 집회인원을 동원했지만 마이크 한번 잡지 못한 채 울산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돌아가는 버스를 타고 계신 이희철회장님께 송구하다는 말씀을 드렸다. 서운했을 법도 하지만 이희철 회장님은 그 취지를 백번 이해한다고 말씀하시고 격려해주었다. 참으로 후배들에게 어른다운 처신을 보여주신 분이다.

이희철 회장님과의 추억 중 특별히 기억나는 것이 있다. 그 집회를 준비하면서도 '태극기'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박사모가족 회원들이 타고온 버스에 종이 태극기가 몇 박스 실려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태극기가 집회 참가자들 손에서 손으로 전달이 됨으로써 연합뉴스 보도에 시민들이 태극기들고 집회하는 사진이 보도되었고, 그 뒤로 열린 집회는 태극기집회로 명명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 뒤로도 집회는 몇 차례 더 있었다. 그 집회 참가자들에게 나눠줄 손 피켓은 청교도영성수련원의 김대안목사님이 해주셨다. 김대안 목사님은 매번 회의에 참여하시고 그 뒤로도 수만 장의 각양각색의 손피켓 디자인과 제작까지 맡아주셨다. 나중에 자금을 마련해 일부라도 갚아드렸지만 지금도 너무 감사한 마음이다.

여의도 국회의사당역 첫 집회에서 신의한수 신혜식씨에게 무대앞 정중앙에서 유튜브방송을 하도록 배려했는데 그 후 신의한수는 태극기집회를 유튜브로 보도하면서 대박을 치면서 정말 신의 한 수가 되었다.

모두 분들이 열정이 넘쳤다. 그렇게 모두 시절이 급변할 그 때 그 분들과 나는 용기를 내어 불의에 저항했다. 모두 양동안 박사님의 말씀처럼 '처변불경의 처세'를 하신 분들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나의 입장을 지지해주었으며 애국일보창간에도 큰 역활을 해주신 고(故) 이경자 대표님의 헌신이 없었다면 첫 태극기집회는 어쩌면 열리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이제 한 해가 또 지나가려고 한다.

윤석열정부가 무너졌던 법치를 바로 세우는 일에 앞장서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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