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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선 이야기] 오랜만에 읽는 징징대지 않은 3‧1절 축사
[삼선 이야기] 오랜만에 읽는 징징대지 않은 3‧1절 축사
  • 프리덤뉴스
  • 승인 2023.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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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읽는 징징대지 않은 31절 축사

 

글쓴이 윤일원

 

오랜만에 아주 오랜만에 대통령의 31절 축사를 읽었다. 징징대거나 피해자인 척하는 내용이 없어서 좋았다. 왜 우리는 31절만 되면 혹은 광복절만 되면 없던 토착 왜구라는 말까지 끄집어내 국론을 분탕질하는 것도 모자라 과거로 회귀하려는 정치권의 얄팍한 수에 전 국민이 둘로 나뉘어 싸우는 이념의 전쟁터로 만들었을까? 제 딴에는 반일 감정을 부추겨 지지기반을 다지고 싶어서였겠지만 남는 것은 분열뿐이었다.

윤 대통령의 31절 축사는 한 일이 만들어 낸 생채기투성이의 과거는 잊지 않으면서도 내일의 만성적 북핵 위기와 11개월 연속 무역적자를 한미일 협력을 통해서 극복하려는 다짐이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3.1운동 이후 한 세기가 지난 지금 일본은 과거 군국주의 침략자에서 우리와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고 안보와 경제, 그리고 글로벌 어젠다에서 협력하는 파트너가 되었습니다. (중략) 영광의 역사든, 부끄럽고 슬픈 역사든 역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미래를 지키고 준비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일본이 한 일이라면 겨자씨만 한 만행이라도 발굴하여 바윗돌에 새기는 것을 당연시하였다. 그러나 불과 4년 전인 2019년 한반도에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잊고 산다. 그때 나는 이마트에서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고 거의 실신할 지경에 이르렀다. 한일관계가 최악으로 치닫고 전국적으로 일본 제품 불매 운동으로 불타오를 때였다. 한 예쁘장한 아주머니가 아끼바리가 일본산 쌀이니 사면 안 되지요?”하고 남편한테 물으니, 남편은 자랑스럽게 당연히 아끼바리는 일본 쌀이지한다. 쌀은 물론 후지사과조차 일본산 품종이라고 사 먹지 않을 때였고, 깡촌 시골 구석구석에도 노재팬, 노아베를 외치면서 가지 않습니다. 사지 않습니다의 현수막을 내걸었다. 나는 오호라 드디어 우리나라가 중국의 문화대혁명 시대로 되돌아갔구나를 한탄하였다. 2022년 일본이 코로나19 조치를 완화하자 일본 관광객 3명 중 1명은 한국인이 되었다. 지난달에는 565,000, 12456,000, 11315,000, 10123,000명이 일본을 찾았다. “가지 않습니다. 사지 않습니다.”라는 지난날 맹세는 어디로 가고, 왜 우리는 일본을 그토록 좋아하는 민족이 되었을까?

국가 기념일 중에 3.1절만큼 중요한 행사는 없다. 그만큼 3.1절이 국가에 커다란 의미로 다가오는 이유는 비폭력 평화 독립운동이었기 때문이다. 세계사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럼 없이 자랑할 수 있는 거의 유일무이한 거대한 독립운동이었다. 그 참여 규모뿐만 아니라 비폭력운동으로 식민지 시대를 살아간 우리 국민에게 국가가 무엇이며 민족이 무엇인지 근대적 자각을 깨우치게 한 대 사건이었다. 191931운동은 불씨 하나 없는 칠흑 같은 그 시대에 광복이라는 미래를 이야기한 것이지 1592년 발생한 임진왜란을 들쑤셔 과거의 일본 만행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다. 미래가 없는 과거의 이야기는 자기성찰이 없는 찌든 자기 비하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다.

지구 표면적의 84%가 식민지 시대였던 18세기 말 19세기 초 우리와 비슷한 경험을 동남아 나라들의 실용적 인식이 우리의 반면교사가 되지 않을까 한다. 베트남은 유럽의 대항해시대 말미에 참여한 프랑스가 1882년 베트남을 식민지화하여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일본이 1941년 태평양 전쟁을 할 때 다시 일본의 지배를 당한다. 그리고 19452차 세계대전이 종식되어 독립되는 듯하였으나 프랑스가 인도차이나반도의 전략적 중요성을 알고 다시 식민 지배를 강압하였다. 결국, 1954년 프랑스가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대패함으로써 완전히 철수하였고, 미국이 프랑스의 전략에 휘말려 베트남전에 참여한 것이 계기가 되어 다시 1964~1975년 월남전이 발생하였다. 이 중에서 일본이 태평양 전쟁 당시 베트남에 가한 잔혹 행위는 조선보다 훨씬 더 가혹하였다. 왜냐하면 일본은 동남아를 자원의 조달로 여겨 산업 개발 없이 오직 착취만 취한 결과 대략 40만 명이 희생당했다. 타이완의 경우는 조선 땅에서 벌어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배함으로써 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고 타이완을 일본에 할양한 것을 계기로 일본 식민지가 되어 1945년 독립을 맞이했다. 50만의 독립이었다.

동아시아 3국인 한국, 중국, 일본 중 가장 먼저 근대화를 시작한 나라가 일본이다. 1774년 이미 인체 해부도인 해체신서(解體新書)을 번역하여 실증할 정도였으니까. 일본의 관점에서 대만은 열강들이 침입하는 루트라서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지역이었다. 그래서 일찍부터 식민지화를 추구했다. 1872년 류큐 왕국이었던 오키나와를 아예 자국으로 편입한 것도 그 일례다. 잘 알다시피 타이완이나 베트남에서 반일 감정은 거의 없다. 오히려 일본의 자본으로 경제를 부흥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베트남에서 삼성(한국)의 영향보다 일본 자본의 영향이 더 절대적이라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대만의 경우 산업화의 자본과 기술을 거의 일본에 의지하고 장개석(蔣介石)조차 일본을 공공연히 존경한다고 말할 정도다.

그렇다고 그들이 역사를 잊었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 나는 역사를 배우는 이유가 그들의 잘못한 이유를 들춰내어 사죄받기 위해서만 있지 않다고 본다. 미래를 위해 협력할 것을 협력하고 경쟁할 것은 경쟁함이 마땅하다. 국가의 존재 이유가 도덕을 위함이 아니라 생존을 위함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육지로 국경을 맞대 중국의 영향이 바다를 마주한 일본보다 더 악질적이었다. 국가란 국력의 차이만큼 간섭받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다.

1780, 연암 박지원을 청나라 황제의 칠순 잔치 축하사절단으로 북경으로 떠났다. 압록강을 건너 하룻밤을 자고 도착한 곳이 책문, 청나라 국경 검문소였다. 거기서부터 청나라 영토라 사신의 인원과 물품을 점검받고 떠났다. 압록강과 책문 사이의 영토는 소위 DMZ로서 공통 영토였다. 이 영토를 다 빼앗아 간 나라가 중국이다. 근대사를 조금만 읽어 보면 조선의 근대화를 가장 방해한 나라가 청나라 위안스카이(원세개)였다. 왜냐하면 당연한 사실이 아닌가? 조선이 근대화되지 못하면 청의 지배를 연속할 수 있으니까? 서재필과 같은 선각자가 그토록 독립’, ‘독립을 외치고 서대문에 독립문을 지은 것은 청으로부터 독립이지 일본으로부터 독립이 아니었다.

내 생각은 변함이 없다. 일본에 날을 세우는 논리라면 당연히 중국()에도 같은 논리를 적용함이 성숙한 국제사회의 일원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이웃 나라의 사죄 문서를 아무리 높이 쌓아 놓아도 강제할 힘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으며, 또다시 내부 분열로 국력이 약해질 때 침공당하면 얼마나 더 억울하리오. 우리가 저들보다 힘이 더 월등하게 될 때까지 이념 논쟁보다 묵묵히 힘을 비축함이 더 현명하다.

2023. 3. 4. 윤일원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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