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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학 칼럼] 한중일 국민성론은 어떻게 탄생되었나?
[김문학 칼럼] 한중일 국민성론은 어떻게 탄생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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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3.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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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일 국민성론은 어떻게 탄생되었나?

 

김문학(비교문화학자, 문명비평가)

 

 

메이지 이래 19세기 중후반부터 왕성하게 전개되온 일본의 일본인론, 일본문화론은 많은 경우에 국민성에 관한 것(찬미와 비판이 다 포괄됨)이었다. 당연히 동아시아 근대 문명의 도가니였던 일본이 국민성에 관한 논의를 선구적으로 착수하여 추진한 것은 새삼스럽게 놀랄 일은 아니다. 서구 문명과의 조우에서 일본인은 서구 민족과 비교하여 자신들의 국민성이 어떻게 다른가, 어떤 장단점이 있는가를 해명하려는 노력이 지대했다. 현재 국민성을 계급, 계층, 성별, 연령, 지역 등 차이를 고려하지 않은 국민성 일반을 논할 수 있냐는 문제도 있다. 그러나 이런 차이를 넘어서 한 민족에게는 대부분 공통된 국민성(민족성)을 추출해 내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사회심리학, 문화인류학 및 심리인류학 등의 분야에서 어떤 국민이나 민족의 성원이 나타내는 가장 빈번한퍼서널리티(성격)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규명되어 있다.

1875년 일본의 최대 계몽지식인인 후쿠자와 유키치의 글과 문명론의 개략에 이미 국민성에 해당한 인민의 기질, 기풍 등의 단어가 등장한다. 지식인 니시아마네가 1875년에 발표한 국민기풍론은 일본 국민성을 논한 최초의 포괄적인 글이다.

상세한 계보는 여기서 다 기술할 수 없는 분량이므로 생략하지만, 1907년 국문학자 하가야이치의 국민성101891년 철학자 미야케세츠레이의 진선미 일본등과 함께 일본의 본격적 국민성 저작의 효시로 알려져 있다.

일본에서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기에 걸쳐 중국인의 국민성 내지 조선인의 국민성에 대해서도 거론해왔는데 이는 중국인 자신의 국민성 논의에 큰 영향을 주게 된다. 당시 중국 지신인 중 중국의 국민성에 대해 논의를 처음 출발시킨 사람은 유신파 지식인의 거장이었던 양계초이며, 그 뒤 노신 등이 뒤를 따랐다.

일본 망명중이었던 양계초가 일본에서 일본인의 영향을 받은 것은 자타가 다 시인하는 바이다. 그는 이렇게 자백한다.

나는 동녘(일본)에 겨를이 없었으며 뇌질에 변혁이 이루고 사상 언론은 예전에 비해 완전히 판이하게 되었노라”(음빙실집 중화서국 185페이지)

양계초는 일본에서 서구문명의 사상, 관념을 수용하여 신문과 잡지를 통해 왕성하게 중국에 발산한 계몽사상가, 지식인으로 거듭나게 되는 바, ‘국민성이란 용어를 일본에서 배워서 중국에 전파시켰다.

사실 국민성개념은 당시 유행했던 프랑스 사회심리학자인 르봉(lebon)의 집단심리(the groupmind)라는 개념에서 파생된 것이다. 19세기말 20세기로 이르는 시기 일본에서는 르봉의 사회심리학 이론이 대거 수용되며 일본에 있던 양계초 등 지식인이 당연히 일본의 영향으로 르봉의 이론에 접하고 큰 영향을 받게 되었다.

르봉의 집체심리는 1920년대까지 성행했는 바 이 개념은 유신, 혁명파들에게도 지배적 영향을 끼치고 5.4운동 사조에까지 파급된다. 집단심리학은 인간들 사이에 암시(suggestion)’ ‘모방(imitation)’ 동정(sympathy)으로 집단심리의 형성을 해석했다. 그 이론의 중요한 한 갈래가 바로 국민성 연구였는데 주로 독일, 프랑스 양국에서 유행했다. 이런 이론을 중국에서는 국민심리학으로 번역, 정착되었으며 이로부터 국민성용어가 파생되었다.

집단심리학의 권위자인 르봉의 저서로는 국민심리학을 주장한 <민족진화적 심리학>(1894)<군중심리>라는 저작이 일본에서 1895년에 번역되어 대유행했다. 손융기 교수의 논고에 의하면 1903년 양계초의 동생인 양계훈이 <신민충보>에 연재한 <국민심리와 교육의 관계> 일문에서 프랑스의 르봉의 저작을 소개하며 국민성을 국민교육으로 개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03년 북아메리카를 방문 중이던 양계초도 그곳의 중국인들의 지저분한 생활상을 목격한 후 르봉의 이론으로 국민심리에 대해 언급하기 위해 <신민설>에서는 아예 르봉의 저작 <민족진화의 심리법치>의 긴 글을 그래도 옮겨 썼다.

양계초는 국민성 개조에 관한 글을 대량으로 발표했는데 <중국인 민족의 장래를 논함>1899, <국민십대원기론>1899, <중국 국민의 품격을 논함>1903 등이 유명하다. 당시 동맹회의 핵심인물 왕정위도 르봉의 심리학으로 국민성을 혁명적으로 갱신할 수 있다는 글을 발표했고, 당시 유학생 잡지인 <절강조>에 국민성 비판론을 실었다.

조선의 천재로 불리운 근대 문학의 대부 춘원 이광수의 <민족개조론>1922 에도 르봉의 영향이 보인다. 르봉의 이론에 따라 조선민족에도 가변적인 민족성과 불변적인 민족성이 있음을 구분하고 전자가 조선조에 돌아와서 부정적으로 굴절되었음을 지적했다. 그는 세계 우수 민족으로 진화해 나감을 지향하고 변질된 민족성을 새롭게 개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본과 서양 문화의 세례를 받은 이광수다운 개혁의 목소리였다. 일본에서는 이미 한물 지난 국민성 비판론이 중국과 한국에서는 21세기에도 빈번히 논의되고 있다. 국민성의 개조와 향상은 한국과 중국에서는 아마 미완성의 과제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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