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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학 칼럼] 친일파의 무덤에도 봄은 오는가
[김문학 칼럼] 친일파의 무덤에도 봄은 오는가
  • 프리덤뉴스
  • 승인 2023.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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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의 무덤에도 봄은 오는가

 

김문학(문명비평가, 비교문화학자)

 

식민지 체험은 피식민 민족에게 기나긴 어둠의 회한을 낳는다. 따라서 그것은 그만큼 참 좋은 양태로 풀기 어려운 숙제들을 남기기도 한다필자가 근대아시아사를 재조명하는 동기 중의 하나는 이전에는 풀지 못했던 숙제를 풀어보자는 소박한 의도에서다. 100년이 지난 오늘까지 친일반일의 음지에 있는 우리 민족의 치욕이자 통한의 주제로서 항상 우리의 가슴을 비분하게 만든다.

필자는 이렇듯 우리 민족사에서 덧나는 상처처럼 괴로운 친일파” 문제에 대해 근대 100여년의 사료를 읽으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친일파=매국노” “친일파를 처벌주고 척결해야 한다는 주장이 지금까지 성세를 이루고 있는데도 "이런 의식이나 주장이 과연 얼마나 합리적일 수 있는가?"  "과거역사의 진실에 얼마나 접근한 발상인가?" 라는 반문조차 제기되지 않은 채  대부분의 국민들은 이런 주장을 무조건 맹종하고 있다.

필자가 근대사를 읽으면서 발견한 역사적 사실에서는 친일행위보다도 오히려 친일에 대한 인식이나 반성에 대한 현대인의 문제도 문제삼아야 한다는 점이다.  조선총독부 건물을 기억에서 영구히 지우려고 인공적으로 철폐하면서도 독립기념관을 세워 일제의 만행을 또 영구히 기억하려는 것은 모순이다. 누구나 이 모순을 지적하지 않았지만 필자는 이 모순적 사실에서 현대 우리 민족의 과거 역사에 대한 기본적인 태도의 모순을 읽는 듯했다.

친일파=매국노" 라는 등식의 대척점에 있는 민족 영웅 안중근의사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안중근의 친일의 모습에 대해 미처 하지 못한 발견을 하게 되리라고 필자는 믿는다. 필자는 국제 안중근 기념협회일본지회장으로 수년동안 그의 사상을 비롯해 이등박문과의 관계에 대해 연구를 해왔다안중근이 왜 우리에게 위대한 영웅인가? 이등박문은 1905-1909년 일제의 대표로 한국정부에 임한 침략자로서 한국의 최대의 침략자의 원흉이자 상징적 인물이었다. 따라서 이등박문을 저격한 일은 일본 침략에 대한 저항, 반일을 상징한다.

필자는 또 이런 발견을 했다. 안의사가 그렇게도 많은 한국독립투쟁사의 김구, 안창호, 박은식, 여운영, 이승만, 서재필 등 쟁쟁한 인물을 누르고 최정상의 영웅 지위를 획득할 수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 문제는 한국 근대사에 답안이 있다. 19세기 후반부터 말기와 20세기 한국식민지 시기부터 1945년까지 통털어 개화파와 보수파, 저항파와 친중파, 친로파 및 친일파가 역동의 드라마를 펼쳤다. 특히 3.1 운동의 민족운동가나 독립운동가들도 그 후에는 일본 제국통치에 적극 내지 소극적 협력, 이른바 부일협력으로 전락해버린다.

그래서 김옥균으로부터 김성수, 이승만, 김일성까지도 많은 민족운동가들에게는 기필코 더럽힌 과거를 묻고 있다그러나 이와 지극히 대조적인 것이 바로 안중근이다. 그가 우선 일제 침략의 설계사인 이등박문을 처단한 것이고, 이는 최대의 독립의 심벌적 행동이었으며, 또 하나는 그가 불과 5개월의 짧은 투옥생활을 거쳐 깨끗하게 순국한 것이다. 여기에는 앞서 말한 쟁쟁한 독립운동가들에게 있는 더럽힌과거 같은 것이 일말도 없다.

그러므로 안중근이 근대 반일 독립의 최고의 영웅이 되는 것은 당연한 흐름이리라 새로 조명된 안중근은 동양평화론의 사상가였다. 이 의미는 지대하다. 그런데 냉철히 말해 그렇게 아름다운 동양평화론이 권총의 탄환 형태로 밖에 나타나지 못했던 것은 안중근에게도 이등에게도 그리고 모두 조선인과 일본인에게도 비극이었다. (김기협 <망국의 역사 조선을 말하다>)

그리고 문제는 친일파가 왜 친일파로 되었는가 하는 역사적 상황, 이유를 따져야 한다. 1860년대 이후 명치유신을 거친 근대 일본과 양무운동을 겪은 청국에 뒤진 조선은 제국주의 식민주의 시대에 미처 따라가지 못해 스스로 많은 내부 문제를 내포하게 만든다또한 조선 조정의 재정은 일본이나 청국 조정에 비해 취약했으며 자신들이 스스로 의도했던 개혁도 일본이나 러시아 또는 청국에 의지해야할 만큼 역량이 빈약했던 절박성을 알고 있었다. 김옥균, 박영효 등 개화파가 친일파로 된 데는 그 역사적 배경에서 오는 심각한 번뇌를 안고 있었다. 이를 외면하고 단순히 친일파” “매국노로 지탄해도 의미가 없다.

더욱이 동일 맥락에서 한일 병합이후 이 문제는 더 두드러진다. 19193.1 독립운동 이후 상해에서 망명독립가들이 만든 임시정부는 불행하게 국제 열강의 승인을 받지 못했으며 일제의 통치 또한 교묘해져 많은 독립운동가들은 독립운동을 지속하기 위해 하는 수 없이 친일파로 전향해야 했다. 당시 친일은 숱한 독립운동가, 지식인 엘리트들의 생존방식이었다. 3.1 독립선언문의 기초자 최남선이 그랬고 근대 문학의 대부 춘원 이광수, 그리고 백철, 김동리, 모윤숙, 노천명, 이명도 역시 그랬다.

왜 독립운동가들이 자치운동, 최종적으로 전쟁시기 대일협력자로 전향해야 했을까? 이광수가 훗날 민족 보존을 위해 친일했다는 변소에 누구도 외면하고 그 말의 진의를 부정하기만 한다. 사실 이 한마디에 이광수같은 당대 최고 엘리트들의 열길 물속의 속궁리가 들어있는 것이다친일파를 매국노로 이제 후세가 된 우리가 비판, 지탄함을 너무도 쉽다. 그러나 여기에는 우리 후세의 현재의 심정을 그대로 역사의 과거에 투영시켜 버린 그 우가 남을 뿐이다.

인간의 문화사가 입증해주는 바와 같이 인간은 현실과 타협하여 적응시키는 자만이 살아 남는 법이다. 그 어떤 민족적 이상주의나 고상한 이념만으로 인간이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신을 보존할 줄 모르고 어찌 다시 싸워 이길 수 있는가? 역사가 거울이고, 앞으로의 지침서라 외치기를 즐기는데 그 시대의 역사 인물들이 어떻게 현실과 격투하여 적응하면서 지혜롭게 살아왔는가를 배우는 것이다.

지금도 친일파의 무덤에는 차디찬 겨울의 엄동설한이 맴돌며 무덤에 침뱉고 째책으로 타매하기에 여념이 없다실로 슬픈 일이다. 이제 역사에 대해 좀 더 현명하고 이분법적 편협한 인식에서 탈피하는 날, 필자는 믿는다. 그러면 얼어붙은 삭막한 친일파의 무덤에도 봄은 올 것이라고 그리고 진달래가 만발할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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