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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학 칼럼} 근대 한중일의 “아시아주의” 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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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3.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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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한중일의 아시아주의계보

 

김문학(문명비평가, 비교문화학자)

 

 

100여 년 전 19세기말 동아시아의 학지적, 언설적 도가니였던 일본에서 아시아주의사상이 생성되는 것은 매유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근대 한중일 동아시아 역사의 흐름속에서 조감해보아도 이 아시아주의사상, 언설, 구상은 지대한 의미를 지녔다. 왜냐하면 동아시아의 근대사가 서양열강과의 만남과 충돌, 수용을 주축으로 전개됐으니 그것을 어떻게 자연스럽게 해소시키는가 하는 문제의식에서 아시아연대적인 아시아주의가 탄생했기 때문이다.

이제 다시 21세기가 된 오늘에 빈번히 제기되는 동아시아공동체구상에 대해 직언하자면, 100여 년 전 동아시아의 선각자들이 발안했고 행동으로 실천해왔던 아시아주의사상이 그 밑거름이 된 것이다. 최근 한, 중,일 등 동아시아에서 또다시 아시아주의" 가 재등장하면서 동아시아의 연대를 강조하고 있는 시점에서 (그것은 또한 유럽EU연합에 대응, 방법적인 수용으로서) 옛날에 융성했던 아시아주의계보를 따져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동아시아공동체를 창설하는데 많은 시사를 받게 되는 것을 자명한 일이다.

아시아주의가 일본에서 탄생된 탓으로 중국과 한국 학계에서는 늘 화려한 미사여구로 포장한 침략사상이라고 일축해왔다. 물론 아시아주의가 침략에 이용당한 면을 감안하며 비판해야 하는 것는 지당하지만 그 중에서도 비판으로만 일관시키지 못할 면도 실재했다는 것을 망각해서는 안된다.

손문이 아시아주의의 깃발을 높이 들고 중국 혁명을 통해 아시아의 연대를 소리 높이 주장한 일생을 상기하시라. 20세기 전반까지 중국의 많은 지식인, 정치가, 개혁파 그리고 한국에서도 아시아주의을 적극 호응, 수용하여 각기 조국의 근대화 성취에 밑거름으로 보탰던 것이다.

그런 아시아주의는 한중일에서 끈질긴 계보를 이루고 있다. 서로 싫어하고 비탄하면서도 적극적인 요소는 수용했던 것이다.

<탈아론>과 함께 획기적인 사상으로서 등장한 타루이의 <대동합방론>은 이상적인 아시아주의를 고하여 일본과 조선이 연합하고 중국과 동맹으로 묶어서 서양 백인종과 대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주장한 아시아주의는 일본이 조선, 중국과 연대하여 일국주의를 초월한 형식으로 노정됐다. 아시아주의에 동일한 문화, 문명, 민족 등 화두들이 섞이면서 아시아 민족들의 마음을 매료시킬 수 있었다. 특히 서구열강의 식민지배라는 구도 속에 포위된 중국에서 아시아주의가 표방하는 서구문명에 대항하는 황색인종과 백색인종의 대결 사상은 쉽게 당시의 중국 정치인, 지식인에게 공명을 불러 일으킬 수 있었다.

근대 주일공사 하여장은 일찍 아시아주의를 이해하고 호응해나선 인물이었다. 그 뒤 양계초, 장태영, 채원배, 손문이 그 중국적 계보를 줄줄이 잇는다. 장태영은 아시아 약소민족의 연합, 동맹을 강조함으로서 황인종이 백인종에 대항해야 한다는 아시아주의를 표방한다. 1907년 그는 진독수 등 동지들을 모아 인도 망명지식인과 함께 아시아를 발족시켜 반제국주의의 독립을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인생의 3분의 1 시간을 망명과 혁명활동으로 일본에서 지낸 손문에게도 아시아주의사상은 매력적이었다. 일본의 대아시아주의의 거울인 국자주의자 토야마 우치다 등 아시아주의를 소리높이 주장한 대륙낭인들과 지극히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온 손문은 아시아주의의 주자이자 실천자이기도 했다. 또한 지극히 친일적인 그는 일본의 메이지유신 성공과 그 뒤 벌어진 두차례 전쟁(청일, 청러)의 승리를 기뻐했으며 아시아주의에서 청조를 뒤엎고 한족 국가 재건의 적극적 요소를 찾았다. 그리하여 그는 일본의 아시아주의에 적극 호응, 수용하여 중일 연대의 아시아적 연맹을 통해 혁명 전략을 실현하려 노력한다. 1912년 중화민국 성립 후에도 원세개에서 밀려 반원투쟁을 전개할 때 역시 아시아주의를 빈번히 제기한다. 그 뒤 일본인에게 아시아주의를 실천하기를 원했다. 1913년 그는 일본방문 시에 한 연설에서 일본의 문명체계나 민국의 문맹 계통은 동일하다 아시아인이 아시아를 관리한다고 외친다. 그 뒤 일본의 일국독신적인 아시아주의를 이용한 침탈의 진면목을 본 손문은 일본의 정책에 실망하나 그는 여전히 아시아주의의 향수를 버리지 못했다. 1924년 코베에서 한 연설에서도 그 역시 아시아주의 연대로 일본의 침략을 막아보려고 부심한 흔적이 보인다.

조선에서 아시아주의계보는 1884년 갑신정변을 주도한 개화 리더 김옥균에게서 공명을 일으키며 이어진다. 김옥균이 일본 망명시 구상한 “3화주의는 조선의 개혁문제를 동아시아적 시각에서 일한청 2국이 제휴하여 구미동의 침략을 방어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그 소스가 된 것이 바로 타루이의 대통합방론 적인 아시아의 동맹사상이었다.

그 뒤 일진회의 이용구가 적극 아시아주의사상을 수용하여 한일합방을 시도한다. 그는 한일동맹으로 러시아의 남하를 막고 아시아 부흥을 통해 조선의 개혁이 살아남는 길을 선택했던 것이다. 일진회와 그의 합방 구상을 민족사관에서 친일매국으로 비판하기는 쉬우나 그의 아시아주의 사상의 깊이에 대해서는 이작 좀 더 깊은 인식이 필요할 것이다.

1910년 안중근이 여순감옥에서 집필한 미완 원고 <동양평화론>은 김옥균의 3화주의 사상이 담긴 아시아주의사상의 산물이었다. 생전에 일본을 좋아했던 그는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했을 때 환호한 청년이었다. “한청일, 3국 연대하여 여순을 공동관리지로 정하여 동양평화의 본부를 두고” “3국의 공동은행 설립” “3국 청년 공동군단 결성” “두나라는 일본의 지도 아래서 상공업 발전을 도모하며서양세력에 대항하는 구상을 그는 창안한다.

아시아주의적 연대사상은 100년이 지난 오늘도 여전히 적극적인 형태로 동아시아의 공동체형성을 뒷받침하는 지적 지침으로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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