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07 22:52 (일)
[논단] 대동아공영권과 일본 군국주의
[논단] 대동아공영권과 일본 군국주의
  • 프리덤뉴스
  • 승인 2023.12.0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군국주의 일본의 팽창과 대동아공영권의 변질

 

대동아공영권과 일본 군국주의

 

정광제(한국근현대사연구회 고문)

 

'대동아공영권'은 '아시아 민족이 서양 세력의 식민지배로부터 해방되려면 일본을 중심으로 대동아공영권을 결성하여 서양 세력을 몰아내야 한다'며 1940년 8월 1일 마쓰오카 요스케(松岡洋右) 일본국 외무대신의 담화에서 처음 등장한 개념이다.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슬로건은 내용 자체로는 모든 아시아인에게 고무적인 내용을 담고 있지만, 아쉽게도 일본 군국주의가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에 침략전쟁의 수단으로 이용된 측면도 있어서, 이후 오랜 세월동안 그 누구도 입에 담으려 하지 않는 금기어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전후 일본의 자학사관에서 대동아공영권은 절대 언급되거나 연구되어서는 안 되는 주제였다. 또한 대동아공영권은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침략을 당한 나라들에겐 지옥의 묵시록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과거에 대한 실체는 덮혀진 채, 어림짐작과 편견만으로 밝은 미래를 보장할 수 없다. 부정적 측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본래의 실체를 드러내는 것이 역사학의 의무라고 생각한다면, 대동아공영권은 우리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할 문제이다.

제국주의[帝國主義 imperialism]의 사전적 정의는 군사적, 경제적으로 남의 나라를 정복하여 큰 나라를 건설하려고 하는 침략주의적 경향을 일컫는다. 즉 제국주의는 영토 확장주의, 식민지 건설주의이다. 먼로주의라 함은 미국 제 5대 대통령 먼로가 주창한 외교사의 중립정책으로 일종의 고립주의이다. 1823년(조선 순조 23년) 먼로 대통령이 의회에 보낸 교서에서 유럽 각국이 미 대륙의 문제에 간섭함을 반대하며, 미국은 유럽 문제에 개입하지 않을 것을 선언한 이래, 오랫동안 미국 외교정책의 기조가 되었다.

그러나 19세기 말부터 세계적 지위로 비약하면서 미국의 외교적 태도가 차차 세계정책 결정에 적극적인 경향으로 바뀜에 따라 이 경향은 줄어들었으며, 제 2차 세계대전 후에는 거의 폐기상태가 되었다. 즉 유럽과 신대륙은 서로 다른 정치체제를 가지고 있으므로 별개의 지역으로 남아야 할 것임을 선언하면서 아래와 같은 4가지 기본조항을 밝혔다.

① 미국은 유럽 열강의 국내문제나 열강 사이의 세력다툼에 개입하지 않는다. ② 미국은 아메리카 대륙의 기존 유럽 식민지와 보호령을 인정하고 간섭하지 않는다. ③ 장차 아메리카 대륙에서의 식민지 건설을 엄금한다. ④ 유럽 열강이 아메리카 대륙의 어떠한 나라라도 억압하고 통제하려고 한다면, 이는 미국에 대한 적대행위로 간주될 것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불간섭주의라고 알고 있는 먼로주의는 1번과 2번 조항이다. 그러나 일본의 대동아공영권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3번과 4번 조항을 주목해야 한다. 1940년 6월 29일 일본국 외무대신 아리타 하치로의 라디오 연설 "국제 정세와 일본의 위치"에서 선언된 대동아공영권은 당시로부터 117년 전 먼로주의의 깊은 내막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일본은 먼로주의가 유럽과 미국 사이의 단순한 '불간섭주의'가 아니었고, 발호하는 유럽 제국주의에 대한, 독립한지 겨우 47년 밖에 안 된 신생국 미국의 적극적 방어적 선언이었음을 알고 있었다. 대동아공영권은 먼로주의의 아시아적 부활, 또는 아시아 버전이라는 것이 이 글의 주장이다. 유럽제국은 아프리카 대부분을 식민지로 점령함과 동시에 동진東進, 아시아로 제국의 힘을 쏟아부어왔다.

영국이 인도와 홍콩을, 프랑스가 베트남을,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를, 포르투갈이 마카오를, 스페인이 필리핀을, 독일이 적도 이북의 북양군도를 손에 넣었다. 당시 일본에게 유럽제국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동북아 지역에서 이같이 부상하는 서구의 도전을 가장 명확하게 인식하고 대응했던 것은 불행히도 일본밖에 없었다. 청나라도 조선도 이같은 국제정세를 바라볼 혜안과 여유가 없었다. 이같은 유럽제국 세력들에 대한 아시아 국가 간의 공동 대응책이 대동아공영권의 본래 의도이다.  대동아공영권은 우리가 알고 있듯이, 일본 제국주의의 단순한 침략근성의 발로가 아니었다. 인종차별이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조건하에서 전략적으로 택한 일본의 미래노선이었다.

군부를 중심으로 한 제국주의 일본은 드디어 1910년 조선을 전쟁없이 평화적으로 흡수 병합함으로써 오랜 역사를 통해 시도해오던 대륙진출의 꿈을 이루기 시작했다. 이와 거의 동시에 대륙에서는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했고 러시아제국은 1917년 소비에트 혁명에 의해 무너지고 말았다. 이로 인해 동아시아에 존재하던 청나라 중심의 힘의 균형은 무너지고 일본의 대륙 진출에 유리한 여건이 조성되기 시작했다. 그 무렵 1914년 유럽에서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은 일본에게 좋은 기회가 되었는데, 일본은 영국이 아시아 지역에서 독일군을 공격해달라고 요청하자 재빨리 독일에 선전포고를 한 다음 동아시아와 태평양 지역에 있던 독일의 영토와 재산을 모두 압수하고 많은 이권을 차지할 수 있었다.

이때 일본은 적도 이북에 있는 독일령 북양군도를 점령, 일본제국의 영토로 편입시킬 수 있었다. 이 기간 동안 일본의 경제도 대호황을 구가하며 급성장했다. 즉 1910년대 일본제국은 급변하는 세계정치의 조류 속에서 직접 전쟁을 겪지 않으면서도 전쟁 물자를 판매해 경제 성장을 도모하고 각종 영토와 이권을 차지해 국력을 확장할 수 있는 기회로 이용했다. 특히 제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유럽과 미국은 막대한 자원 소모와 산업시설 파괴, 인명피해를 감수한 데 반해 일본은 배후에서 정치 경제적인 이득을 취함으로써 열강 사이의 기존 세력관계에는 중대한 변화가 발생하게 되었다. 다른 제국주의 열강들이 그러했듯이, 이 시대 일본도 점차 경제력과 군사력이 성장함에 따라 전쟁이나 동맹을 통해 점차 영토를 확장해 나갔다.

일본은 1895년 청나라와 전쟁을 통해 대만을, 1905년에는 러시아와의 전쟁을 통해 조선반도와 요동반도, 사할린, 쿠릴 열도 등을 영토에 편입할 수 있었다. 일본 제국주의의 팽창정책이 극에 달했던 1942년에 이르게 되면 일본은 동서로 인도에서 하와이까지, 남북으로는 적도에서 몽골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영향권에 둘 수 있었다. 1930년대는 전 세계를 휩쓴 대공황으로 인해 세계 자본주의의 미래가 암담하던 시절이었다. 그 결과 자본주의 제국, 특히 스페인과 독일, 이탈리아 같은 후발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파시즘이 대두하면서 민주주의와 사회주의가 강한 탄압을 받았는데, 이런 조류에서 일본도 예외가 아니었다.

일본은 1930년대 치안유지법이라는 강력한 공안법안을 만들어 좌익과 자유주의자들을 탄압하였다. 하지만 일본의 파시즘은 이탈리아나 독일과는 다른 양상으로 나타났다. 히틀러나 무솔리니처럼 카리스마를 지닌 파시스트가 등장하여 지도자로 부상하는 대신 일본에서는 점차 내각에 군인들이 많이 참여하면서 군국주의의 색채를 띠게 된다. 이 시대 일본의 군국주의는 살아있는 神인 천황을 중심으로 일본이 단결하여 아시아를 유럽인으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는 대동아 공동번영의 강한 사명감을 가지고 활발하게 군사행동의 범위를 넓혀 가는 형태로 나타났다. 일본 국내에서는 이미 병합된 조선, 대만을 막론하고 반체제 운동과 공산주의 운동에는 강력한 탄압이 가해졌다.

1930년대 중반이 되자 일본 내각은 군부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하고 군부에 의해 휘둘리는 신세로 전락했다. 예컨대 1931년의 만주사변이나 1937년 마르코폴로 다리(노구교) 사건 등은 본국으로부터 아무런 훈령이나 지시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 관동군의 지도부가 독자적으로 군사행동을 시작하고, 이를 일본 내각에서 사후 추인하는 식으로 전개되었다. 이같이 군부를 중심으로 하는 제국주의 일본에게 대동아공영권은 더이상 아시아인들의 평화공존의 캐치플레이즈가 아니었다. 메이지 유신부터 시작한 일본 제국의 근대 사상의 헤게모니는 아시아주의로 시작하여 대동아공영권으로 종결되었다고 볼수있다. 자원 부족과 경제 제재에 시달리던 일본 제국이 더 많은 자원을 확보하고 더 거대한 블록 경제 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시작한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한 명분으로 대동아공영권이 오용되었다.

아시아 대륙을 향해 진출하면서 일본은 황인종의 단합과 공동번영을 정치 슬로건으로 제시하기 시작하였다. 일본은 만주를 점령하기 직전인 1931년 5족 화합의 슬로건을 내걸었는데, 이는 일본, 조선, 만주, 중국, 몽골의 다섯 민족이 서로 화합해야 한다는 뜻으로서 지금으로 보면 북방계 몽골로이드의 단일 블록을 제창한 것이다. 이같이 대동아공영권의 내용 자체로는 모든 아시아인에게 고무적인 내용을 담고 있지만, 아쉽게도 일본 군국주의가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에 침략전쟁의 수단으로 이용된 측면도 있기에, 이후 오랜 세월동안 그 누구도 입에 담으려 하지 않는 금기어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이런 금기가 낳은 것이 동북아에서의 근대 역사문제로 인한 오해와 관계의 서먹함이다. 물론 대동아공영권 하나만으로 조선 병합을 포함하는 동북아 근대사 전체를 평가하고 서술할 수는 없다. 하지만 뒤틀어진 역사감정의 기저에 이같은 일본의 '미래정책'이 있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또한 현재에도 동북아에는 미국을 중심으로 하든, 일본을 중심으로 하든, 중국을 중심으로 하든 끊임없이 동북아공영을 위한 정치, 경제 불록이 논의되고 부분적으로 형성되고 있다. 따라서 비판받아야 하는 것은 대동아공영권을 이용한 그당시 군국주의 세력이지, 대동아공영권 자체는 아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