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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학 칼럼] 국민과 명태
[김문학 칼럼] 국민과 명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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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3.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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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과 명태

 

김문학(문명비평가, 비교문화학자)

 

 

역사공부를 하면서 필자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역사란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숨어있는 매장된 구체적인 실체라는 것이다.

그것을 파헤치면 보물이 나올 수도 있고 반대로 더러운 오물이 나올 수도 있는 법이다. 위정자들은 그 보물을 자기 미화의 도구로 쓰지만 오물은 될수록 덮어 감추거나 망각하려고 한다그러나 경우에 따라 보물이 오물로 변하고 오물이 되려 보물이 변하는 때도 있다. 어떻게 이용하기 탓이다. 따라서 서로 전혀 이질되거나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듯한 실체나 의식들도 역사란 시공간 속에서는 의외로 서로 궁합이 맞는 경우도 흔히 있는 법이다. 국민과 명태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조급해 마시고 역시 필자의 졸문을 천천히 읽기를 권한다.

민족이란 단어가 1880년대 일본에서 탄생돼 조선의 민족사학자, 독립운동가인 신채호에 의해 1908년경 <독사신론>등 문장으로 사용하고 전파시킨 것이다. 이처럼 국민이란 용어도 겨우 백여년이란 역사 밖에 안된다. 역시 민족’ ‘국가란 용어도 겨우 백여년이란 역사 밖에 안 된다. 역시 민족’‘국가’‘혁명’‘민주’‘자유등 수많은 근대 용어와 같이 국민은 일제한자어이다

고려대 이헌창교수에 다르면 한국의 대한매일신보에서 국민이라는 단어는 190576, 1907243, 1908324, 1910년에는319건에 이르며 20세기초 국민의 사용도가 매우 급속히 증폭되었다고 한다물론 국민은 근대 국가의 민이라는 근대 개념이다. 조선시대 초기에도 국민이란 단어는 존재했으나 뜻은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라는 민본이념은 있었음에도 민은 어디까지나 피통지자인 신민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나라를 지키는 세력은 민이 아니라 사대부라는 인식이 농후했다개항기 일본의 조선 침입등으로 인해 국민국가개념이 유입되며 특히 김옥균, 유길준 등 조선 말기 지식인의 일본을 통해 수용한 근대 서양문명을 통해 국민의식이 점차 퍼진다.

근대 조선의 첫 유학생이며 지식인의 대표격인 유길준(1856-1914)은 그의 저작 <서유견문>에서 국민의 자유, 권리 및 국가를 지킬 의무에 대해 상세히 정시했다. 따라서 <서유견문>은 풍부한 서양의 근대 문물, 개념을 소개하면서 조선 국민에게 국민국가의 주인, 주체라는 의식을 계몽해 준 대단한 책이었다일본의 본을 따서 갑오개혁시기 조선 정부에서도 엘리트의 주장을 받아들여 <국민소학독본>을 출간하여 국민의 소질향상, 애국주의 양성을 고취했다.

신채호는 1910222일 대한매일신보에 <20세기 신국민>이란 글을 발표하여 “20세기의 국가 경쟁은 그 원동력이 한 두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그 국민 전체에 있다고 주장했다. 이 시기의 한국 지식인의 사상은 일본은 물론 중국의 양계초, 업복 등의 서적을 통해 국민, 애국심 등 의식을 수용하기도 했다. 그럼 이제부터 명태에 대해 얘기하기로 하자. 명태는 모든 조선인이 즐기는 가장 대중화된 생선이다국민과 명태의 연결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즉 다시 말해 명태는 국민의 생선이라는 것이다. 나라에 따라 지리자연 환경과 역사적 경험 및 그에 의해 훈육된 국민성 기질에 의해 국민의 먹고 즐기는 식생활, 식문화도 제각기 다르다.

필자는 먹는데 관한 국민성을 식민성(食民性)이라는 신조어를 잘 사용한다. 중국 국민들이 짜차이나 처우떠우후를 즐기고 일본인이 신선한 생선(사시미)을 즐기듯이 한국 국민이 명태를 즐기는 것은 그 나라 국민의 식문화뿐만아니라 역사, 지리 풍토와도 연관된다조선반도는 3면이 바다인 반도이므로 근해역에서 명태를 많이 잡았다. 국민적 생선이 된 것은 이미 19세기 말기 정착됐다고 전해진다. 1877년에 나온 <일동유기>(김기수)에는 아주 많이 생산되고 값이 싼 이유로 우리나라 사람은 산골짜기의 노인, 여자, 어린아이에 이르기까지 북어를 모르는 자가 없었도다고 기술돼있다.

신선한 것을 명태, 마른 것은 북어라는 말과 같이 마른 명태(북어)는 저장과 운반에 편리했으므로 전 조선 국민이 특히 즐겨먹는 생선의 으뜸으로 보급되었다19세기에 이미 궁중의 음식 재료로서 대구 대신 북어가 많이 사용되었다고 하며 (이규경 <오주연문장전산고>) “백성들은 명태로 제사물로 빈궁한 선비도 제사식물로 사용하여 흔하면서도 귀한 것이었다고 한다1870년대 이후 일본에 의한 개항으로 철도, 가선의 교통 운반기술에 의해 명태의 유통이 급격히 증폭되었다. 1910년 경부선에서 지방 도시에서 서울로 운송되는 명태는 1만태(1태는 2000마리)에 달했다고 하니 놀라운 숫자이다.

일본인은 명태를 좋아 하지만 아무래도 한국인에게는 못 미친다. 일한 합방이 되면서 원격지 명태 유통은 일본인이 장악했다고 한다명태에다 소주 또는 명태에다 맥주, 이 음주 문화의 풍경은 역시 100여년이 지난 오늘 한국의 국민적 음주 풍속도를 이루고 있지 않은가. 한국 국민은 역시 세계 최고의 명태 국민, 명태 민족이다그러므로 조선 민족을 명태민족이라 칭해도 과히 화 낼일은 아닐 것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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