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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학 칼럼] 일진회는 무엇이었나
[김문학 칼럼] 일진회는 무엇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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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4.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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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진회는 무엇이었나

 

김문학(문명비평가, 비교문화학자)

 

한국의 역사책이나 국사교과서에서는 일진회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고 있거나, 혹시 취급했다 해도 일본이 조선 침략을 위해 억지로 창설한 친일 단체라고 한마디 식으로 요약해 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근대사에서 일진회는 그냥 쉽게 친일매국”“일본괴뢰단체로 일괄하기에는 무리이며 이런 안이한 친일, 괴뢰 단체라는 인식은 사실 당시의 한국의 실상을 정확히 바라보지 못한 우를 범하고 있다. 필자가 당시의 사료들을 섭렵한 결론은 한국병합에 이른 한국의 실상을 무시하거나 왜곡한채 그와 관련된 사례들을 오늘의 시각으로 자의적인 판단을 하고 있는 아쉬움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일진회는 20세기 초 조선혁명 지향의 여러 혁명단체들이 연합하여 결성한 최대 규모의 정치 단체이며 당시 조선이 놓인 국제적 정세를 감안하여 일어난 조직으로서 그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그뒤 조선의 혁명이 성공하게 된다. 한국과 일본의 근대사의 하나의 맥락을 일진회를 누락시키고서는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일진회의 구성원은 공히 100만명이라고 한다. 그러나 병합 당시 조선 통감부의 자료에 따르면 14만명이며, 당시 조선 최대의 정치조직임을 알 수 있다. 조선인구가 1,300만이었으니 한중의 친일반동세력으로 일축할 수 없는 거대한 민간단체였다19048월 일진회는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진보회 등 조선의 여러 혁명단체를 연합하여 결성된다. 이용구가 회장, 송병준이 평의원장을 맡는다당시 일진회가 내 건 오대강령은 (1) 한국황실의 존중 (2) 인민의 생명 재산의 안전 보호 (3) 정부시정의 개선 (4) 재정,군정의 정리 (5) 일본에 대한 협력이란 내용이 포괄된다. 일진회는 창설 후 국정개혁을 요구하는 한편, 단발하고 양복차림으로 외모혁명을 이루고 문명개화의 리드자로서 조선 사회에 신선한 모습을 보인다.

일진회가 실천한 것은 일본식 근대혁명을 습득한 근대 혁명이었다. 당시 제2차 일한협약에 의해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된 한국의 국권회복 또는 독립개혁을 지향한 애국운동이 반일의병운동과 애국계몽운동으로 융성했는데 일본군의 막강한 병력에 실패하게 된다. 대한 가 중심으로 되어 애국, 교육추진, 산업진흥 등 자력적 증강을 노린 운동을 벌인다. 그 역시 당초에는 일본과 동맹을 통해 독립 자강의 근대화를 지향 하지만 점차 일본의 보호정치에 대해 비판, 대립으로 흐른다.

1907년 비밀단체인 신민회가 윤치호, 이승만, 안창호 등에 의해 민족 독립 운동을 전개하지만 한국이 병합되자 해외 망명자와 국내잔류자로 분열된다. 애국계몽운동은 결국 일본제국의 탄압과 또 하나의 이유로 많은 국민의 지를 획득하지 못한 채 좌절당하게 된다바로 이런 시기 다른 형식으로 조선을 혁명으로 구제하는 노선을 택하는 단체가 생긴다. “아시아주의사상으로 일본과 동맹관계를 강화시켜 한일 합방을 추진하고자하는 대중운동이 그것이었다. 일진회의 이용구등이 구상한 한일합방이 대표적이다여기서 잠깐 일진회의 리더 이용구(1868-1912)의 인물상을 살펴본다.

경상도 태생인 그는 23세에 동학당 제2대 교주 최시형 문하에 들어가 그 뒤 3.1 독립 운동의 대표자로 된 손병희와 함께 동학당 간부로 활약한다. 1894년 전봉준을 지원하여 일본군과 싸워 부상을 입기까지 하며 포로로 되어 죽음에서 간신히 살아난다. 1899년 동학당 3대 교주 손병희와 같이 만주, 청국을 거쳐 일본을 방문하여 발달되고 정연한 일본을 느낀다. 그는 조선의 개척운동은 단순히 국내 문제로 해결할 성질이 아니다. 넓은 아시아적 시야가 필요하다. 또한 전 아시아가 시선을 집중한 일본, 메이지 유신 성공으로 완전한 독립국가로 된 일본이 본보기가 되었기 때문이다고 판단한다. 타루이의 <대동합방론>의 영향을 분명 지대하게 받게 되고 일한 동맹만이 러시아 등 서구 세력의 침습을 막는 길이라고 확신한다.

아시아주의사상의 시각에 일찍 개안한 그는 손문과 유사한 경향의 인물이었음을 발견된다. 단순히 그는 오늘의 시각으로 친일매국노로 매도하기엔 어려운 그런 인물이며, 오히려 손문적인 패턴의 일본의 힘을 빌리려 했던 애국자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그가 아시아적 시야에서 시국을 동찰한 형안을 부정할 수 없다. 조선이 자립으로 독립을 이룰 힘이 모자란 상황에서 일본과의 대등한 합방을 그는 선차적으로 선택한 대는 그의 통찰력이 뒷받침해준다. 당시의 일진회의 한일합방운동에 대해 미국 정치학자 엔더슨은 이렇게 기술한다. 일본 및 조선내부의 동맹자가 1905년에서 1910년에 이르는 동안에 일본의 조선병합에 대한 대중의 정치적 지지를 획득한 것에 성공한 방법은 그 방법의 호악을 차치하고서라도 열국의 정치적 대중동원의 역사속에서도 가장 흥미로운 하나였다. 사실 그것은 정치사상, 자기 민족에 대해 행해진 반민족주의적인 대중운동으로서 지금까지 유일한 하나의 예였다” 보다시피 근대민족국가 형성 시기에 민족 독립이기에 앞서 우선 타국과 합방을 제창하여 운동을 전개하여 대중의 지지를 획득한 예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용구의 일진회가 추진한 합방은 아시아주의적인 대등합방이었다. 그 운동이 십여만의 대중의 호응을 얻은데는 그 당시 조선의 부패한 사회배경을 말해준다. 조선의 항쟁사를 다룬 영국의 특파원 메켄지는 조선이 비주기에서 한국 인민이 일본에 우호적이고 동조적인 것에는 일본이 조선의 지방관료의 부패한 압정을 대신 고쳐줄 것이라 기대했기 떄문이며 조선의 개혁은 외국의 원조와 일본이 필요했다고 인식했다고 밝힌다. 헨더슨 역시 '조선의 정치사회에서 중국보다 일본에 기대를 건 조선인이 대부분이었고 일본 역시 전반적으로 지원을 했다' 고 지적한다.

일진회가 일한방합을 청원한 것은 보호국을 거친 독립 구산이 아닌 합방으로 독립을 이룬 다른 차원의 세계관이었다. 일본의 흑룍회의 우치다등 지지를 얻은 일진회의 합방청원은 1909124일 이토히로부미가 피살된지 한달여만에 발표한다당시 총리대신 이완용은 일진회의 청원을 방치하며 반대했으나 그 뒤 찬동하기에 이른다, 19109월 한국병합 직후 조선총독부는 일진회를 해산시키고 만다. 자신들의 통치에 불리하다가 간주한 까닭이다이용구는 일본에 배신당했다고 비분히 말한다. 그는 1911년 일본코베에서 병을 요양하다가 다음해 5월 고난의 생애를 접는다. 향년 45세였다. 이용구의 비극은 한국 민국의 비극을 상징하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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