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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칼럼1] 근대성의 파라독스와 하이에크 철학
[철학 칼럼1] 근대성의 파라독스와 하이에크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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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4.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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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자생적 질서, 그리고 노장 [1]

근대성의 파라독스와 하이에크 철학

 

최 진 덕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철학)

 

인간은 신처럼 완전한 존재가 아니다. 인간 속에는 늘 채워지지 못한 부분이 있다. 그 결여로 인해 인간은 자신 안에 머물지 못하고 늘 바깥의 타자로 향한다. 타자지향성이 곧 욕망이다. 감각도, 사유도 자신의 결여를 채우고자 하는 타자지향성으로서의 욕망의 발로들이다. 타자를 자신 속에 삼키려 하건 아니면 반대로 타자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려 하건 타자지향성으로서의 욕망은 늘 자기중심적이다. 경제적 교환행위 또한 늘 그런 욕망의 발로라 할 수 있다.

인간에게는 물건을 교환하려는 경향성이 있다고 아담 스미스는 말한다. 하지만 인간은 물건의 교환 자체에서 기쁨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칼 멩어는 자신의 필요를 최대한 만족시키려는 인간의 욕망이 교역의 기원이라고 말한다. 필요란 불완전하면서도 자기중심적 존재인 인간이 스스로 느끼는 결여의 다른 이름이다. 필요 혹은 결여를 메우고자 하는 욕망은 소유를 통해 비로소 채워지지만 소유의 욕망은 타인과의 비교의식 속에서 더욱 첨예해진다.

그래서 자신의 필요를 만족시키려는 소유의 욕망은 항상 남보다 더 많은 이익을 얻으려는 욕망과 함께 간다. 가장 원시적인 형태의 물물교환에도 대부분의 경우 상대방보다 더 많은 이익을 얻으려는 욕망이 작용한다. 상대방보다 더 많은 이익을 얻으려는 욕망은 무의식적인 것이어서 의식에 의한 통제가 거의 불가능하다. 통제가 거의 불가능한 욕망이라면 자연스러운 욕망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전통적인 도덕은 생활상의 필요를 채우기 위한 물물교환에는 찬성하면서도 이익 추구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반대한다. 예컨대 맹자는 농부가 남은 곡식으로 목수가 만든 물건과 바꾸는 식의 통공역사(通功易事),” 즉 분업과 교환을 자연스러운 일로 여긴다. 하지만 맹자는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교환하는물물교환이 시장의 본래적 기능이라 단정하고, 이익 추구는 시장의 본래적 기능을 위반한 것이라 보아, 시장에서 이익을 추구하는 상인을 천장부(賤丈夫)”라고 폄하한다. 맹자학은 조선조 오백년을 지배했던 주자학의 원천이다. 이익 추구에 능한 천장부, 주자학의 용어로 말하자면, 천리(天理) 즉 자연의 질서를 모르고 인욕(人欲) 즉 인간의 욕망만 추구하는 인간이다.

시장과 상업과 교환에 대한 부정적 태도는 동서를 막론하고 전근대인들의 일반적 태도였다. 이런 위선적 태도의 뿌리에는 신의 말씀 혹은 자연의 질서에 근거를 둔 도덕률에 따라 인간의 욕망을 부정하고 상업적 이익의 추구를 부정하는 전통 종교 혹은 전통 도덕이 자리 잡고 있다. 전통적 가르침에 따르면 이기심은 악이고 이타심은 선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타인의 이익을 위한 행동만을 도덕적으로 인정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보다 타인의 이익을 먼저 고려할 때 세상이 아름다워진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신분 차별이 없는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사회를 만들고 놀라운 과학기술문명을 이룩하여 평화와 번영을 인류에게 선사한 것은 이윤추구를 목표로 하는 저 부도덕한 상업활동이었다. 근대문명의 진짜 핵심은 철학이나 종교, 예술이나 과학이 아니라 상업이었다. 근대는 부르주아라 불리는 천장부들 혹은 소인(小人)의 시대였다. 남들보다 더 많은 이익을 얻고자 하는, 군자가 이닌 소인들의 상업활동이 전쟁이 아니라 평화를 가져오고 빈곤이 아니라 번영을 가져온다는 역사적 사실의 경험은 전통 종교나 전통 도덕의 가르침으로는 도무지 설명이 안 된다.

바로 이 근대성의 파라독스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철학적으로 해명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은, 이윤추구의 상업활동과 장로교 경건주의가 함께 발달하던 스코틀랜드 상업사회를 배경으로 등장한, 데이비드 흄이나 아담 스미스와 같은 계몽주의자들이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옹호한 그들의 자유주의 철학은 영국의 평화와 번영을 이끌었고 19세기 이후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그러나 고전적 자유주의 철학은 19세기말 이후 20세기에 걸쳐 인간의 욕망적 현실을 부정하고 지상낙원의 이상을 꿈꾸었던 온갖 몽상가들의 도전을 받았다. 마르크스와 같은 사회주의자들, 사회주의와 국가주의를 결합한 파시스트들, 그리고 사회주의와 자유주의를 적당히 혼합한 사회민주주의자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세계사적으로 보면 20세기는 몽상가들이 승리했던 반자유주의의 시대였다.

자유주의가 크게 퇴조한 20세기에 하이에크는 개인들의 경제활동이 의도하지 않았던 사회제도를 만들어낸다고 말한 칼 멩어 이래 오스트리아 경제학파의 전통을 계승하는 한편 더 거슬러 올라가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사회주의자들에 맞서 홀로 고전적 자유주의를 옹호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하이에크 철학의 근본 문제 또한 근대성의 파라독스였다. 파라독스의 한편에는 이익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망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평화와 번영과 문명의 발전이 있었다. 하이에크에게는 인간의 욕망을 총괄하는 말이 자유였다. 평화와 번영과 문명의 발전을 가져온 질서를 대변하는 말이 자생적 질서였다. 그리고 자유와 자생적 질서의 파라독스를 해결해준 이론적 틀은 문화적 진화론이었다.

하이에크의 자유주의 철학을 관류하고 있는, 불변의 신 혹은 실체를 추구하는 신학과 형이상학에 대한 부정, 변화의 세계 혹은 욕망의 세계에 대한 긍정, 이성의 오만에 대한 반대, 인위적 간섭에 대한 거부,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유자생적 질서에 대한 그의 예찬을 보면, 흥미롭게도 하이에크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동아시아의 노장사상을 떠올리게 한다. 하이에크와 노장 사이에는 분명히 연속성도 있지만 불연속성도 있다.

얼핏 생각해보면 양자 간의 연속성이 먼저 떠오르지만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면 불연속성이 훨씬 더 커 보인다. 자유도, 자생적 질서도 인간의 욕망에서 비롯되는 작위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노장의 무위자연과는 거리가 멀다. 정부의 불간섭은 무위자연으로 돌아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작위를 조장하기 위해 작위에 대해 간섭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정부는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 법과 제도를 마련하는 작위를 멈출 수 없다. 문화적 진화의 과정은 모든 개인과 집단에게 적자생존을 위한 분투노력을 쉬임없이 요구한다. 다윈의 생물학적 진화건 하이에크의 문화적 진화건 둘 다 무위자연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노장 사상은 고정된 내용이 없이 상황에 따라 가변적이므로 하나의 원칙을 고수하지 않는다. 인간의 욕망에서 비롯되는 모든 작위를 때로는 다 부정하기도 하고, 때로는 다 긍정하기도 한다. 노장에 따르면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고 결국은 다 좋다. 원칙이라고는 없는 헷갈림의 무한 진폭 속에서 노장은 인간의 욕망과 작위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는 하이에크의 철학을 다 받아들일 수 있다. 양자 간에는 연속성 내지 유사성이 있다기보다는 차라리 동일성이 있다고 말해야 좋을지 모른다.

이하에서는 하이에크의 자유자생적 질서두 개념을 살펴보면서 하이에크와 노장 간의 불연속성과 연속성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이 시도는 하이에크를 아직 잘 모르는 필자가 지금까지의 학습에 기초하여 그의 철학을 필자의 머릿속 좌표 위에 적절하게 위치 지우기 위한 것이다. 이 시도는 앞으로 더 잘 학습하기 위한 준비일 뿐,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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