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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덕 철학 칼럼 3] 자생적 질서와 노장의 도(道)
[최진덕 철학 칼럼 3] 자생적 질서와 노장의 도(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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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4.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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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자생적 질서와 노장의 도(道)

 

최진덕(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하이에크의 자유론보다는 그의 자생적 질서론이 노장 사상과 더 유사하다는 느낌을 준다. “이성의 오만에 근거한 사회주의 계획경제라든가 시장에 대한 국가의 인위적 간섭에 반대하기 위해 내세운 자생적 질서혹은 자기조직적 질서라는 용어가 무위지치(無爲之治)를 쉽게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장의 무위지치가 어떤 방식의 통치를 가르치는지는 도무지 명확하지가 않다. 그것은 정치적 상황에 따라 자유방임일 수도 있지만 정반대로 법가적 전체주의일 수도 있고 병가의 변화무쌍한 술수(術數)일 수도 있다. 이처럼 일정한 원칙을 고수하지 않고 정치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유연성이 무위지치의 본질이라고 한다면 법의 지배라는 원칙을 고수하는 하이에크와 노장 사이의 거리가 매우 멀다.

수렵채취시대의 인간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소규모 공동체 속에서 살아왔지만 교역의 발달과 더불어 공동체로부터 자유로운 개인이 분해되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등장한 자유로운 개인들이 교역을 통해 대규모 사회를 만들고 문명을 만들었다. 소규모 공동체 내부의 강제가 싫어서 자유로운 개인이 되고 싶어 했던 것은 남들보다 더 뛰어나고 싶거나 남들보다 더 많이 가지고 싶어 하는 소유의 욕망 때문이었다. 하이예크는 소유욕이란 말을 쓰지 않고 욕망이라는 말도 잘 쓰지 않지만 개인과 자유의 존립근거는 소유의 욕망이라고 생각된다. 소유욕이나 이기심은 사회적 인간의 사실일 뿐, 그것을 악으로 보면 안 된다.

그러나 소유욕은 소규모 공동체 속에서 오랫동안 길러진 자연적 본능의 눈으로 보면 악()이다. 하이에크는 우리를 사회적 존재로 만든 원리는 예외 없이 악이라는 맨더빌의 놀라운 말을 인용한다. 대규모 사회는 소규모 공동체의 작동원리와는 다른 원리에 의해 작동한다는 뜻이다. 원시사회의 공동체는 이타적 사랑의 공동체를 지향했을 것이다. 하지만 데이비드 흄이 지적하듯 사랑의 마음으로는 대규모 사회에 적응할 수가 없다. 사랑과 대규모 사회는 모순적이다. 대규모 사회에서는 이타심보다는 이기심이, 협력보다는 경쟁이 더 필요하다.

대규모 사회의 존립 근거가 소유욕이기 때문에 소유욕을 부정하는 소규모 공동체의 사랑, 협력, 이타심과 같은 가치들은 자유로운 개인들과 그들의 독자적 행동들을 부정함으로써 대규모 사회의 존립 자체를 위협할 수 있다. 소유욕은 자유로운 개인들을 만들고 그들을 상호작용하게 하여 대규모 사회를 만들고 문명을 발전시켰다. 왜 소유욕이 가진 이기적 경향성은 대규모 사회를 약육강식의 전장으로 만들지 않고 평화와 번영, 그리고 문명을 가져오는가. 이 물음이 바로 위에서 말한 근대성의 파라독스를 가리킨다. 이 파라독스의 해결책이 자생적 질서다.

데이비드 흄의 통찰에 따르면, 자유로운 개인들이 각자의 이익을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는 시장에서는 누구나 자신이 전혀 모르는 다른 누군가를 위해 자신도 모르게 봉사하게 되고, 공공의 이익에는 추호의 관심도 없는 악인조차 자신도 모르게 공공선에 기여하게 된다. 흄의 이런 통찰은 곧바로 빵집 주인과 푸줏간 주인의 이기심이 다른 사람들을 이롭게 한다는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을 떠올리게 한다. 하이에크는 스코틀랜드 도덕철학자들의 그런 통찰과 더불어 인류는 비로소 자생적 질서라는 개념을 깨닫기 시작했다고 지적한다. 그는 보이지 않는 손보이지 않는, 또는 관측할 수 없는 패턴”, 다시 말해 자생적 질서로 해석한다.

자생적 질서의 기초에는 개인의 소유 즉 사적 소유(재산)가 있다. 개인의 자유는 개인의 소유와 불가분하다. 아담 퍼거슨은 노예를 아직 소유를 모르는 사람으로 정의한 바 있다. 노예는 소유를 모르므로 자유를 모르고, 자유를 모르므로 법(질서)을 모른다. 동물도 노예와 마찬가지로 소유를 모르므로 자유를 모르고, 자유를 모르므로 법을 모른다. 그러므로 자생적 질서는 재산의 소유와 교환에 관한 규칙으로부터 시작된다. 내 것과 네 것을 구별하는 재산소유의 규칙으로부터 언어, 화폐, 습속, 도덕, 법률, 조직, 국가 등 인간 세상에 필수적인 온갖 질서 혹은 제도가 진화해 왔다.

고대 희랍철학의 근본 문제는 피시스(physis)와 노모스(nomos)의 문제였다. 마찬가지로 고대 중국철학의 근본 문제도 (자연)(인간)의 문제였다. 인간은 자신의 세계를 자신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것과 자신의 힘으로 바꾸거나 만들 수 있는 것으로 나누었기 때문에 피시스와 노모스의 구분, 혹은 천과 인의 구분이 생겨났다고 생각된다. 피시스는 인간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근원적인 어떤 것으로서 자연적 질서의 원천이다. 반면 노모스는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만든 질서 즉 인위적 질서를 일괄하는 말이다. 피시스와 노모스의 구분은 뒷날 자연법과 실정법의 구분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하이에크는 피시스도 아니고 노모스도 아닌 제삼의 질서로서 자생적 질서를 제시하여 서양의 전통적인 이분법에 반기를 든다. 그는 자연적 질서(피시스)의 반댓말로 탁시스(taxis)를 새로 제안하고 자생적 질서를 노모스로 본다. 노모스로서의 자생적 질서는 피시스와 탁시스 사이의 애매한 위치에 있으면서 양자와 다르기도 하고 다르지 않기도 하다. 그리하여 하이에크는 아담 퍼거슨의 말을 빌어 자생적 질서를 인간행동의 결과이지만 인간계획의 결과는 아닌질서라고 설명한다. 인간행동의 결과이므로 탁시스처럼 인위적이라 할 수 있고, 인간계획의 결과가 아니므로 피시스처럼 자연적이라 할 수 있다.

피시스와 노모스(탁시스), 자연법과 실정법, 자연과 인간의 이분법의 근저에는 인간의 자기중심적 세계관이 있다. 희랍시대 이래 오랜 전통을 가진 서양의 그런 이분법을 수정한 하이에크의 삼분법은 인간의 자기중심적 세계관을 극복하고 경제현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해서 이론화하려는 그의 철저한 과학적 태도의 산물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성의 오만을 경계하고 인간의 근본적 무지를 강조한 것은 경제현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함에 있어 구성주의적 합리주의(constructive rationalism)의 한계를 명백히 보았기 때문이다. 하이에크는 구성주의적 합리주의를 또 하나의 미신으로 본다. 합리주의자들보다 더 과학적인 하이에크의 그런 태도는 칼 멩어 이래 오스트리아 경제학파의 전통일 것이다.

칼 멩어는 인간의 이기심(self-interest) 위에 자신의 경제과학을 정초하고자 했다. 이기심의 세계에서는 인간은 누구나 개인이 될 수밖에 없다. 칼 멩어는 자신의 방법론적 개인주의를 자연과학의 원자론과 연계시키는가 하면 개별적 행위자들의 이기적 행동이 그 의도와는 정반대로 자애로운 사회제도를 만들어 낸다고 보았다. 하이에크의 자생적 질서론은 스코틀란드 계몽주의자들의 진화론적 사유뿐만 아니라 칼 멩어의 방법론적 개인주의와 원자론적 접근으로부터도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된다.

소유의 규칙에서 출발하는 자생적 질서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상호작용의 결과로서 생겨나 그들의 생존과 번영에 도움을 주게 되면 모방을 통해 다른 집단으로 전파되어 수정 보완되는 가운데 점진적으로 진화하게 된다. 자생적 질서는 작위하는 인간이 없다면 애당초 생겨날 수 없다는 점에서 보면 분명히 인위적 질서에 속한다. 하지만 개인의 자유가 언제 처음 출현했는지 알 수 없듯이 자생적 질서 또한 누가 언제 처음 고안했는지 알 수 없다. 모든 인간은 자신보다 앞선 다른 인간들이 만든 질서의 전통 안으로 태어나 그 안에서 질서를 배우고 합리적 사유능력을 키운 다음 그 질서를 수정 보완하며 타고난 자연적 본능의 세계 너머 새로운 문명의 질서를 만들어간다.

언어와 법률, 관습과 도덕, 예술과 학문이 그런 식으로 점진적으로 진화해 왔다. 인간의 이성 또한 그런 문화적 진화의 산물이다. 물론 문화적 진화는 생물학적 진화와 다르다. 문화적 진화는 후천적으로 습득된 새로운 질서를 모방과 학습에 의해 전달하는 과정이다. 반면 생물학적 진화는 돌연변이를 통해 생겨난 진화의 산물을 유전적으로 전달하는 과정이다. 생물학적 진화는 매우 더디지만 문화적 진화는 매우 빠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물학적 진화와 문화적 진화는 둘 다 자원의 효율적 활용을 통한 생존과 번영이 목적이라는 점에서, 적자생존의 경쟁 과정이라는 점에서 공통적이고, 또한 둘 다 신이건 인간이건 누군가의 의도적 설계의 견과가 아니라는 점에서, 다시 말해 자연적이라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그래서 하이에크는 문화적 진화의 산물인 자생적 질서가 완전히 자연적이라고 단언한다.

인위적 질서인 동시에 자연적 질서인 자생적 질서 덕분에 자유로운 개인들은 각자 자신의 이익을 위해 최선을 다해 경쟁을 하면서 동시에 협력을 하는 가운데 자신들이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이타적 결과를 낳게 된다. 사람들은 자생적 질서가 생존을 위해 유리하고 평화와 번영이라는 결과를 가져다준다고 믿기 때문에 따를 뿐이다. 자생적 질서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생물학적 진화의 법칙을 알 수 없듯이 문화적 진화의 법칙도 알 수 없다. 그렇다면 자생적 질서는, 황홀해서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노장이 말한 저절로 그러해서 그러한(自然而然)” 도와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

무엇보다도 노장은 자연과 인간을 이원화하여 양자를 대립적으로 보는 인간중심적 관점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하이에크의 자연적 질서는 노장의 도와 닮아있다. 노장은 인간을 대단한 존재로 보지 않는데 하이에크도 인간의 이성을 대단하게 보지 않고, 늘 인간의 근본적 무지를 강조한다. 노장에 따르면 인간은 천지만물 가운데 하나의 사물에 불과하고 역사와 문명은 자연현상의 일종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자연세계의 질서와 인간세계의 질서는 구별이 있을 수 없고,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의 구별도 있을 수 없다. 생물학적 진화와 문화적 진화를 평행관계로 보는 하이에크의 입장도 노장과 비슷하다. 그러나 하이에크의 자생적 질서와 노장의 도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첫째, 자생적 질서는 누가 만든 것인지 알 수 없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작위의 산물임에는 틀림없다. 개인들간의 교역활동이 없었다면 자생적 질서는 생겨날 리가 없었다. 자생적 질서는 인간의 계획의 결과가 아니라는 점에서 자연적이라 할 수 있다 해도 어디까지나 인간세계의 질서을 벗어나지 않는다. 자생적 질서는 자연세계의 질서가 아니고 오직 인간세계에서만 통용된다. 자연세계의 질서는 자연과학의 몫이라고 하이에크는 생각한다.

둘째, 하이에크는 소규모 공동체의 자연적 본능과 대규모 사회의 자생적 질서 혹은 확장된 질서를 명확하게 구분한다. 여기에는 자연을 인간화하는 인간의 작위 즉 노동을 높이는 휴머니즘이 작용하고 있다. 하이에크는 자연세계가 인간의 고향이고 자연세계의 질서가 인간세계까지 지배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그는 내면의 정신적 자유를 추구하는 기도라든가 명상에 대해 아무 관심이 없다. 그는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라고 확고하게 믿는 근대인이다. 그의 자유주의와 개인주의는 그런 휴머니즘의 일종이란 점에서 노장과 정반대라 볼 수도 있고, 그렇게 보지 않을 수도 있다.

셋째, 자생적 질서가 인간세상에 반드시 이로운 결과만 낳지는 않는다. 의도되지 아니한 질서 중에는 해로운 결과를 낳는 경우도 많다. 언어가 사악한 거짓말의 수단이 되는 경우도 있고, 법률이 선량한 사람들을 억압하는 수단이 되는 경우도 있다. 실은 모든 질서는 부작용을 가지고 있다. 인간활동의 결과이면서 인간계획의 결과가 아니긴 하되 부작용을 빚는 나쁜 질서에 대해서도 하이에크는 자생적 질서라고 말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노장에서는 나쁜 결과를 낳는 질서까지도 도라고 부른다. 예컨대 장자는 도둑들 사이에도 도가 있다고 말한다. 노장은 선악의 구별에 대해 무심하다. 반면 하이에크는 선악의 구별을 포기한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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