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1 11:09 (목)
[논단] 노예의 길에서 깡디드를 만나다
[논단] 노예의 길에서 깡디드를 만나다
  • 이지현
  • 승인 2018.02.0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학창시절을 프랑스에서 보낸 필자가 고등학교 2학년때 처음 읽었던 볼테르의 깡디드라는 책에서 받았던 신선한 충격을 기억한다

순진무구한 깡디드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 믿었던 성에서 쫓겨난 후 세계 곳곳을 여행하면서 참혹한 전쟁과 굶주림 등 인간의 모든 불행들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결국 세상은 최선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스승 팡글로스의 철학을 버리고 스스로 밭을 개척하고 발전해 가야 한다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제시하는 내용으로 라이프니츠의 낙천주의 철학을 유쾌하게 비꼬는 작품이었다.

260여 년 전 이 책이 쓰여질 당시 혁명 이전의 프랑스는 계몽사상가 볼테르의 입장에서 구제도와 로마 카톨릭의 모순이 극에 달한 비상식적인 국가였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70여년 전, 1차 세계대전이 끝났음에도 국가발전을 위해 국가의 조직화가 유지되어야 한다는 믿음이 퍼지고 독일과 마찬가지로 영국에서도 자유주의에 대한 경멸 현상이 나타나며 유럽이 전체주의로 흘러가는 것을 감지했던 하이에크는 노예의 길을 통해 경종을 울리고자 했다.

시대적 배경과 목적이 다른 이 두 저서가 최근 대한민국에서 일어나는 비상식적 사건들을 무거운 마음으로 지켜보는 필자에게 전하는 공통적인 메시지가 있었기에 이를 성찰해보고자 한다.

유토피아는 없다

사람들은 종종 개인이 처한 문제를 사회에 결부시키면서 아마도 사회를 변화시키면 개인의 문제가 해결될 듯 착각을 하고, 문제의 모든 책임을 사회에 떠넘기고 싶어 한다.

물론 사회를 통제함으로써 눈에 보이는 일시적인 결과는 얻을 수는 있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주어지지 않은 채 그에 따른 부작용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리고 사회를 통제함으로써 즉각적인 이득을 맛본 사람들은 그 일시적인 충족감에 과연 만족할 수 있을까? 사회주의 자들은 인간의 이러한 심리를 이용하여 사람들에게 부의 동등 분배를 이루는 유토피아를 만들겠다고 약속하며 자신들의 중앙 계획 통제를 합리화 시킨다.

하이에크는 노예의 길에서 이 유토피아 설립을 위한 계획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지, 그래서 얼마나 위험한 발상인지 당시 극히 드문 시대적 통찰력으로 설득력 있는 증거를 제시하며 설명하고 있다.

사회주의는 사회 전체의 이익 또는 어떠한 공공의 선을 이루기 위해 개인의 자유보다 계획의 수단을 우선시 하게 되며, 그 수단을 결정할 누군가가 출현하게 된다.

나치즘과 일본 제국주의는 이렇게 나오게 되었다. 이러한 전체주의 사상은 그 민족의 특수성이 창출한 것이 아니며, 이는 사회 전반에 사회주의 사상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것은 필연적인 과정이다. 그래서 노예의 길인 것이다.

개인의 계획과 사회의 계획은 근본적으로 같을 수 없다.

개인은 각자가 처한 상황에서 무엇이 최선일까 라는 현실적 고민에서 시작하는 계획이지만 사회주의의 계획이란 ‘OO이 최선이다라고 자기들이 정한 가치관에 대해 그 방법과 과정까지 짜주겠다는 것이다. 개인은 다 다르기 때문에 사회주의가 이루어 보겠다는 공동의 최고의 선즉 유토피아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볼테르는 깡디드에서 이상의 나라 엘도라도를 그리며 유토피아는 소설속에서나 가능한 것임을 비꼰다. 물론 볼테르는 당시 로마 카톨릭 교회의 종교적 편협성을 고발하기 위해 엘도라도에는 성직자가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런데 볼테르가 묘사하는 엘도라도를 보며 필자가 가장 흥미롭게 본 장면은 아이들이 해변에서 가지고 놀다 버리는 조약돌이 금은보화라는 것과 주인과 하인이 동등하게 부유하고 타인에게 예의를 갖춘다는 것이다.

즉 금은보화라는 개인적 재물이 가치를 잃고, 모든 사람들이 동등한 부의 분배를 받더라도 모두가 불만 없이 살아가는 세계가 유토피아라는 것이다. 볼테르는 이렇게 오늘날 사회주의자들이 유토피아라고 외치는 조화로운 사회에 대한 허구성을 설파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우리는 우리의 밭을 가꾸어야 한다

하이에크는 무정부주의자가 아니다. 사전에 정한 규칙에 따라 제한된 권력의 국가를 선호한다. 전체주의를 반대하는 강력한 대안의 길은 개인의 권리, 자유, 책임, 개인 자산에 대한 존중을 선호하는 것임을 강조하며 그의 저서 노예의 길의 중심 개념을 만들어 간다.

하이에크에 따르면 현대사회의 극단적인 복잡성은 정치인이 아무리 뛰어나도 국민을 대신해서 현실을 명확하게 직시하고, 공정하게 생각하고, 효과적으로 결정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정치인은 모든 매개변수를 예상하여 국민들을 복지로 인도할 계획을 세울 수 있는 슈퍼맨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자유라는 맥락 안에서 각자 스스로 선택을 하고 책임을 지는 자연적인 메커니즘이 정치인의 개입으로 인해 방해되거나 심지어 파멸되 버린다고 강조한다.

그가 발견의 과정이라고 정의하는 경쟁은 더 나은 자원 분배를 기획하는 것보다 사회 발전에 훨씬 훌륭하게 기여한다. 또한 경쟁은 각각의 자유 주도권을 보장하는 사회에서 혁신과 진보를 장려한다.

그러므로 개인의 지식과 이니셔티브에 가장 좋은 기회를 제공하는 조건을 조성하는 것과, 개인이 최선의 계획을 세울 수 있도록 장려하는 것에 정부의 역할을 국한시키는 것이 국가 발전을 위한 최선의 길이 아닌지 자문해야 한다.

하이에크는 시장보다 모든 사람들의 욕망이나 제도를 잘 조절할 수 있는 곳은 없으며, 그런 조정은 가격과 경쟁을 통해서 시장이 스스로 이루어 낸다고 주장한다. 즉 국가의 역할은 경쟁이 유익하게 작동하도록 적합한 제도적 틀을 창출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Il faut cultiver notre jardin (우리는 우리의 밭을 가꾸어야 합니다). 세상의 부조리한 상황과 끔찍한 경험을 하면서도 이것이 최선이라고 합리화 시키던 깡디드가 낙천주의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현실을 깨닫게 된 후 던지는 마지막 말이다. 깡디드가 밭을 샀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노동을 하고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취하는 경제적 활동이야말로 삶을 좀 더 자유롭고 진취적으로 가꾸게 하는 원동력이며, 이 밭은 하이에크가 굳게 내세우는 바로 자유경제시장이 아니겠는가.

금기를 깨다

전체주의를 비롯한 모든 집단주의 시스템의 공통점은 특정한 사회적 목적을 위해 사회의 노동력을 의도적으로 조직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지향해야 할 사회적 목적은 늘 막연하게 공공의 선 이라던지 또는 일반적 복지와 같이 모호하게 표현된다.

지금 대한민국은 하이에크가 염려했던 그 노예의 길을 걷고 있다.

사람 중심이라는 애매한 슬로건을 내세우고 재벌보다 더 강한 정부를 통해 더 나은 삶을 만들어 줄 수 있을 듯이 선전했던 사람들이 정권을 잡았고, 역시 사람다운 삶이라는 막연한 사회적 목적을 두고 최저임금인상을 강행하여 그에 따른 후폭풍은 국민의 몫으로 돌리더니 이제는 평화 올림픽이라는 자신들이 일방적으로 정해버린 공공의 선을 위해 개인의 자유와 권리보다 중앙 통제의 수단을 중시하기 시작했다.

인간의 궁극적 가치와 행복은 민주주의라는 사상이 아닌 자유의지를 추구하는 것에서 비롯되는 법인데 그 사람들은 오늘도 그 자유를 대한민국 헌법에서 제외시키려 한다.

계획 경제주의와 개인의 자유 후퇴 사이의 인과관계를 거부했던 케인즈처럼 대한민국은 국가사회주의가 실패했던 그 역사를 거부하고 있다.

오늘도 필자는 이미 노예의 길로 들어선 대한민국에서 잘못된 가치관을 가지고 옳지 않은 상황들을 스스로 정당화 시키는 깡디드의 모습을 만난다. *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