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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교를 길목으로 선비들이 다니던 다리
'향교를 길목으로 선비들이 다니던 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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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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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에 와서 만들어진 우리의 다리는 기능성만을 생각한 것이 많다. 강이나 개울의 이쪽과 저쪽을 이어주는 역할에만 충실할 뿐이다. 미적고려가 전혀 안된 흉물스런 다리가 많다.

미적 고려와 견고함은 곧 다리의 생명이다. 경남 창녕군 영산면에 있는 이를 만족시키는 특별한 다리가 있다. 영산읍성 안엔 남북으로 흐르는 개천이 있다.

이 개천을 쉽게 건널 수 있도록 옛 사람들은 이곳에도 규모는 작지만 예쁜 홍교를 놓았다. 영산은 조선시대 읍성이 있던 곳이다. 근대화 개발로 옛 맛은 사라졌고, 현재 성벽도 가정집 돌담으로 쓰이고 있는 등 허물어지고 있다.

아름답고 소박한 홍예(무지개) 석교이자 전통적 교량의 모습을 간직한 유적으로 영산 읍성 내 생활용수 처리시설과 동선을 통한 읍성 구조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인 '유다리'는 향교를 길목으로 선비들이 다니는 다리라고 해 '유다리'로 붙여진 유래가 있다.

유다리는 지금도 있지만 볼 수 없는 기괴한 다리다. 다리는 분명 존재하지만 눈으로 볼 수가 없는 다리다.

창녕군은 제2의 경주라고 불릴 만큼 오랜 역사와 이에 따른 수많은 문화유산을 가진 역사문화의 고장이라고 불리지만, '유다리'는 영산면이 1997년 하천 복개공사 때 콘크리트로 덮어 옛 형태를 알아볼 수는 없으며, 송두리째 포장이 돼버린 것이다.

소위 말해서 생매장이 됐다는 표현이 맞는 말일 것이다. 행정 편의주의에서 묻어버렸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문화적 가치가 없다고 여긴 탓인지 이 땅의 정신적 가치 개념에 대한 무지 때문인지 그대로 묻어버렸는지 모르지만 참 어처구니없다.

다만 그 자리엔 '유다리'가 있다는 조그만 표석 하나만 서 있을 뿐이다. 옛 조상이 물려준 소중한 역사, 학술자료를 훼손했다는 논란까지 일고 있다. 다리길이는 2.9m, 폭 2.8m, 높이 2m로 자그마한 다리다.

화강암으로 축조한 조그마한 무지개형 다리인데 이 다리를 '유(儒)다리' 또는 '이우다리', '놋다리'라고도 부른다. 축조 시기는 기술적인 면으로 볼 때 영산 석빙고를 축조한 삼국시대라고 추측하나 정확히 알 수는 없다고 한다.

또한 유(儒)다리는 인근 구계리 도로가 생기기 전에는 교리와 구계리로 통하는 유일한 통로였다고 한다. 이 다리이름은 교리와 성내리 사이로 흐르는 북쪽 향교 옆 계곡의 물이 영산 앞 시내로 합류하며 이 계곡 서쪽의 향교로 통하는 길이며 유인(儒人)들이 다니는 길이므로 '유다리'에 '유(儒)'자가 붙었다

당시 조선시대엔 유교이념으로 한 향교가 마을마다 세워지고 인근 젊은이들이 모여들어 수업을 받는다. 주로 조선시대엔 유교 이념을 통치수단으로 삼아 공자에 접맥된 터라 이들 학생들을 유학생이라고 부른다. 이들 향교는 주로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조성된다.

내를 건너고 들을 지나 마을 인근 산자락에 차지하고 마을을 내려다보는 등 향교는 유교 정신으로 무장된 사상으로 마을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를 내포하기 마련이다.

지형상 향교에 가기 위해선 마을 밖으로 흐르는 내를 건너야 하기 때문에 다리가 필요했고 특히 평소에는 관계없지만 우기에는 물이 불어 다리가 꼭 필요한 법이다. 앙반집 자제들이 신발을 벗지 않도록 아니 물살에 떠내려가지 않도록 마을에서도 학생들에게 신경을 쓰거나 마을 유지나 학교 측에서 다리를 놓았을 것이다.

과거 선거공략이 다리 놓는 게 최대공략이었듯이 말이다. 그런 맥락을 가진 다리가 경남 창녕군 영산에도 있었다는 것이다. 소위 말해서 유학생들이 건너다녔다고 해서 '유다리'로 이름 붙였다는 것이다.

당시 영산은 현으로 현감이 있던 큰 마을이었다. 학생들은 마을 곁으로 흐르는 내를 건너 영취산 기슭에 있는 향교로 통학해야 했다. 그래서 놓인 다리가 이 '유(儒)다리'다.

또 다른 유래는 유다리라는 명칭은 고어(古語)의 하나이며 어느 곳에서도 들어볼 수 없는 드문 말이다. 이 말은 고대 궁중에서 써온 것인 듯하다.

'유다리'는 둥근 다리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 궁중에서 쓰인 말이다. 음력 정월 보름날 달 밝은 밤에 다리 밟기 놀이가 성행했는데, 지금도 정월 보름 달밤에 이름 있는 큰 다리를 자기의 나이만큼 밟으면 다리가 건강하고 다릿병이 나지 않는다는 하나의 풍속에서 나이 많은 노인네들은 열심히 다리 밟기를 하고 있다.

그런데 옛날 궁중의 공주는 밖에 나가서 일반민과 같이 다리 밟기가 마땅치 않았던지 궁중에서 다리 밟기를 했다고 한다.

궁중의 궁녀들을 줄을 지어 허리를 굽혀 앞사람과 어깨를 짜서 이어 세우고 둥근 다리 모양으로 꾸며서 공주를 그 등위에 올라서게 하고 공주의 양쪽에 궁녀가 각각 공주의 양손을 잡고 궁녀들의 등을 밟으며 다리 밟기 놀이를 했다. 이렇게 궁녀들이 늘어서서 어깨와 등으로 둥글게 만든 다리를 놋다리라고 불렀다.

그렇게 부르기 전에는 유다리라고 불렀다고 하며, 놋다리 혹은 유다리라고 하는 이름이 궁녀에서만 불렀던 다리이름이라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처럼 유서 깊은 고을에서 유적들이 멸실되고 있다. 편의만을 강조하는 현실에서 조상의 흔적이 밀려난 것이다. 다리 하나로 엄청난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외국의 유명한 다리를 생각하면 뭔가 안타까운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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