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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수변호사의 법으로 읽어보는 세상2] 단두대행 직행열차 특별재판부
[김기수변호사의 법으로 읽어보는 세상2] 단두대행 직행열차 특별재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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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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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수/변호사

법이란 무엇인지를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러나 인간은 법 없이는 하루도 평화롭게 살 수 없다. 이제 인간은 자연상태인 채로 혼자 존재할 수 없으며 항상 물질적 거래이든 아니면 혈연적 결합이든 마찬가지로 타인과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수 많은 약속과 약속들이 쌓이고 쌓여 통용되는 지혜가 되고 그 것이 굳어진 것이 관습이다. 그리고 이 관습이 강제력을 획득하는 정치적 과정을 거친 것이 바로 법이다.

인간이 갈등을 해소하고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또 다른 것은 도덕이다. 도덕이나 법은 오래된 지혜가 집적된 것에서는 동일하지만 규범력 즉 강제력이 있는지 여부에서 차이가 난다. 인간이 자연상태에서의 빈곤과 공포에서 벗어나게 된 것은 이 도덕과 법이 발전했기 때문이다. 도덕과 법이 존재하므로 인간은 타인을 믿고 돕고 도움을 받아 결국 인간이 빈곤과 공포를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점차 인간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더욱 의존적인 존재가 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자연적 상태에서 즉 도덕이 존재하기 이전의 자신의 본성이 무엇이었는지를 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오래된 관습과 도덕 그리고 법질서에 거부감을 느끼고 자신과 공동체의 발전을 저해하는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느끼게 된 것은 아닐까?

 인간은 법이 인간의 자유를 제약한다는 측면 즉 법아래 자유가 있게 된다는 사실을 제대로 깨닫지 못한 채 법을 많이 만들어 사회를 개혁하라는 유혹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그래서 법을 통한 사회개혁이 위험하다고 인식하기는 어렵다. 오래된 지혜의 집적물인 ‘법’과 정치적과정의 산물로 만들어질 ‘법률’은 지혜의 산물인 ‘법’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대중들은 물론 정치인들도 인식하지 못한다. 이제 정치과정에서의 다수결이 최대다수의 최대행복 또는 ‘공공선(公共善)’으로 치부된다. 민주주의가 공동체를 파국으로 몰고 가는 위험한 함정이 여기에 있다.

 인간이 공동체에 대한 기여나 호의를 보이는 것은 선이지만 그 반대로 개인의 사익을 추구하려는 행위는 악이라는 관념이 발생한 것은 법과 도덕의 기형적 부산물이다. 왜냐하면 법과 도덕은 개별적 인간에게 스스로 겸손할 것을 넘어서 선한 행동과 공동체의 법적안정을 추구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한편 도덕과 법이 인간의 삶의 지혜가 집적된 것이다 보니 시간이 흘러 삶의 조건과 환경이 변화하면 삶의 지혜도 바뀌고 따라서 도덕과 법도 변천(變遷)이 된다. 그러니 법의 변천(變遷)은 삶의 현상과 시간적 차이가 나는 것이 자연스럽다. 흔히 법은 삼류도시(三流都市)와 같다고들 한다. 그 말은 법이 삶의 현실과 부정합을 이루는 현상을 정확히 표현한 말이다.

법이 삶의 현상과 시차가 발생한다는 사실은 그다지 부정적이지 않다. 오히려 이러한 시간적 간극이 존재함은 새로운 법이 기존의 법질서와 조화되도록 하는 긍정적인 기능을 한다. 따라서 법이 현상과 일부 괴리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따라서 법이 사회의 변화를 따라 서서히 개정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 순리이다.

 한편 세상을 변혁시키고야 말겠다는 결심을 한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시간적 간극을 기다릴 여유가 없다. 그들에게 법은 단지 기존의 질서 또는 계급을 유지하거나 계급간의 물질적 조건의 차이를 유지하는 불평등을 지속시키는 걸림돌일 뿐이다. 그들은 광장에 모여든 군중들에게 자신에게 권력만 주면 당장에 사회의 모든 불평등을 해소할 수 있다고 속삭인다.

그리고 기존의 사회질서를 무너뜨리려고 끊임없이 시도한다. 만약 그들의 시도가 성공하여 기존의 질서와 권력이 무너지고 나면 자신들의 이득을 추구할 수 있는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려고 시도한다. 그 시도에는 불평등을 해소한다는 명분이 자리잡는다. 그리고 그들의 권력을 유지시키고 강화하는데 유용한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방편으로 그들은 기존의 법을 무시하거나 현실과 동떨어진 법률을 제정하려고 한다.

 이러한 권력강화시도는 흔히 공공선(公共善)이라는 부적을 달고 우리 앞에 나타난다. 그리고 법이라는 굴레에 가려져 있던 인간의 원초적 욕망을 자극한다. 억눌려 있던 감정적 복수심, 열등감은 정의의 회복에 대한 열정으로 포장되고 선전된다. 이 선동에 대중은 더욱 열광하며 권력에 채워진 고삐를 풀어주는데 쉽게 동의해주고야 만다.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내는 것, 새로운 가치기준을 설정할 수 있는 힘 그 것이 바로 권력이다. 이 권력은 법의 통제를 받지 않는 속박 받지 않는 권력이다.

 따라서 이 권력은 법을 무시할 수도, 필요한 법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권력에  반대하는 세력은 모두 공공선에 반대하는 반동세력으로 몰려 숙청된다. 이 숙청작업은 합법적으로 진행되지만 모두 형식이고 허울일 뿐이다. 이 형식의 잔인함은 나찌로 표상되는 극우 파시즘에서 최고조에 이르렀고 후대의 법학자들은 이를 형식적 법치주의라고 이름을 붙여 경계하고 민주주의의 보루인 법치주의는 실질적이고 헌법합치적 법치주의여야 한다고 가르쳐왔다.

 최근 대한민국에서도 형식적 법치주의가 유행할 조짐이 나타났다. 최근 자유한국당을 제외한 여야 4당이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재판 거래 의혹사건을 전담할 특별재판부설치법 제정에 합의한 것이다. 여야 4당은 합의한 특별재판부설치법안은 전임 대법원장을 사법부가 공정한 재판을 해낼 수 없다며 전직 대법원장용 특별재판부를 설치하겠다는 것이다. 이 법안은 대한변협, 전국판사회의, 시민사회단체로 특별재판부 추천위원회를 구성하고 재판관을 2배수로 대법원장에게 추천하고 대법원장이 이를 최종결정한다는 방식이다.

 만약 이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여 특별재판부가 재판관추천위원회의 추천을 거쳐 구성된다면 이 특별재판부 재판을 맡게 될 판사는 ‘특별한’ 판사라는 의미로 ‘특별판사(特別判事)’라고 불러야 마땅하다. 이 특별판사제도는 특별법으로 임명되는 특별검사가 삼권분립의 견제와 균형의 원리를 달성할 수 있다는 예외적, 보충적 제도로 합헌인 것과 달리 명백한 위헌이다. 헌법은 판사의 자격은 법률이 정하도록 위임하였지만 판사의 종류는 법률에 위임하지 않았다. 국민은 공명정대한 법원 앞에서 누구나 평등하게 재판받을 권리가 있다.

국민이 지은 죄의 종류에 따라 특별한 판사가 재판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헌법정신이다.

 헌법 제27조 제1항은 ‘모든 국민은 헌법과 법률이 정한 법관에 의하여 법률에 의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라고 규정하고 있는데 여기서 법률이 정한 자격이 있는 법관이라는 의미이다. 헌법 제101조 제3항은 ‘법관의 자격은 법률로 정한다.’라고 되어 있으며 제104조 제3항은 ‘대법원장과 대법관이 아닌 법관은 대법관회의의 동의를 얻어 대법원장이 임명한다.’라고 되어 있다. 따라서 대한민국 국민을 재판할 수 있는 판사는 대법원장, 대법관, 법관뿐이며 법관은 대법관회의의 동의를 얻어 대법원장만이 임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김명수 대법원장은 스스로 대법관회의의 헌법상 권한을 무시하는 입법안에 동조하고 여야4당도 대법관회의의 임명권한을 침해하는 위헌적 법률제정에 합의한 것이다. 심지어는 특별재판부는 판사의 자격이 없어도 된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는 실정이고 보면 대한민국의 실질적 법치주의는 이미 사망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직전 대법원장을 형사소추하더라도 사법부가 공정한 재판을 하기가 어렵다는 판단은 국민적 합의를 거친 것처럼 당연히 의제되었다. 이 명분앞에서 헌법적 가치는 내팽개쳐졌다. 수 천을 헤아리는 특별하지 않은 보통 법관들의 직업적 양심은 이미 깊은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권력의 전횡을 비판하거나 저항의 목소리는 미미하다.

 무소불위의 검찰은 과거 권력에 종사했던 분들을 적폐로 몰아 단두대로 보낼 준비를 마치고 ‘특별재판부’라는 이름의 직행열차를 기다리고 있다. 지금 대한민국은 이 직행열차의 설계작업이 한참 진행 중이다. 앞으로 이 열차에는 그 동안 적폐로 낙인찍힌 사람들이 하나 둘 차례로  실려 단두대로 직행할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는 이 법안에 찬성한 자들에게도 이 열차표는 공평하게 지급될 것이다. 사회변혁을 통해 공공선을 달성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법과 현실이 서로 마주보며 호흡을 맞추는 시간적 간극을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고삐풀린 권력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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