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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미향씨에게 드리는 김학순씨에 대한 질문
윤미향씨에게 드리는 김학순씨에 대한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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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0.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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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순씨가 어째서 강제연행됐으며 어째서 성노예인지 윤미향씨는 답해야

1991년 8월 14일, 김학순씨는 정대협 사무실에 스스로 위안부 피해자라고 밝혔다. 이를 계기로 2017년 12월 국회에서 '일제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보호·지원 및 기념사업 등에 관한 법률' 일부 개정안이 통과되면서, 이전까지 민간에서 진행돼 오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이 국가 기념일로 지정됐다. 

하지만, 김학순씨의 고발 기사나 정대협에서 발행한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증언집을 살펴보면 김학순씨는 일본군 피해자가 아님이 분명하다. 이에 <국사교과서연구소>에서는 당시 보도된 기사와 증언집을 토대로 윤미향씨에게 3가지 질문을 던지며, 반드시 답해 줄 것을 기대한다. 

 

<신문기사>

“김할머니가 종군위안부로 끌려간 것은 만16세 되던 1940년 봄.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마저 재혼해 13세 때 평양 어느 집 양녀로 들어간 김할머니는 평양기생권번을 마치던 해 그 집 또 다른 양녀(당시 17세)와 함께 양아버지에 의해 중일전쟁이 한창 치열한 중국 중부지방으로 끌려갔다.” -1991. 8. 15. 동아일보 -

 

“24년 만주 길림성에서 태어난 김씨는 아버지가 생후 1백일 만에 돌아가신 뒤 생활이 힘들어진 어머니에 의해 14살 때 평양 기생권번으로 팔려갔다. 3년간의 권번 생활을 마친 김씨가 첫 취직인 줄 알고 권번의 양아버지를 따라간 곳이 북중국 철벽진의 일본군 3백여 명이 있는 소부대 앞이었다. ‘나를 데리고 갔던 양아버지도 당시 일본 군인들에게 돈도 못 받고 무력을 나를 그냥 빼앗기는 것 같았습니다.’” -1991. 8. 15. 한겨레-

김학순씨 관련 기사 - 1991. 8. 15. 동아일보
김학순씨 관련 기사 - 1991. 8. 15. 동아일보

 

<정대협 증언집>

내가 열네 살 되던 해 어머니는 재혼을 하셨다. 새아버지는 나보다 나이가 많은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데리고 왔다. 오빠는 스무 살쯤 되었고 언니는 열여섯 살이었는데 그 언니는 함께 한 지 얼마 안 되어 시집을 갔다. 새아버지하고는 같이 있고 싶지 않았지만 그 오빠하고 잘 놀았다.

 

기생집 수양딸로 보내져

 

어머니와 나 둘이서만 살다가 아버지라는 사람하고 함께 사니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란 소리도 안 나오고 그 앞에 잘 나가지도 않았다. 어머니에게도 정이 떨어져 반항을 하곤 하니깐 어머니하고도 사이가 갈라졌다.

어머니는 나를 기생을 기르는 집에 수양딸로 보냈다. 그때 내 나이가 열다섯 살이었다. 어머니와 함께 그 집에 가서 노래를 불러보고 합격했다. 그리고는 어머니가 수양아버지에게 40원을 받고 몇 년 계약으로 나를 그 집에서 살게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도 집에 있는 것이 거북살스럽고 싫어서 그편이 오히려 속 시원하다고 생각했었다.

내가 수양딸로 간 집은 평양부 경제리 133번지였다. 그 집에는 나보다 먼저 온 양딸이 한 명 더 있었다. 나는 그 집에서 금화라고 불렸다. 그 언니하고 나는 평양 기생권번에 같이 다녔다. 그 권번은 2층집이었는데 대문에 큰 간판도 있고 생도도 300명이나 있었다. 나는 2년 정도 권번에 다니면서 춤, 판소리, 시조 등을 열심히 배웠다.

권번에서 졸업증을 받게 되면 정식 기생이 되어 영업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나이가 열아홉 살이 되어야 관에서 기생 허가를 내주었다. 졸업하던 해 내 나이가 열일곱 살이라 졸업을 하고도 영업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양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여기저기 쫓아다니며 허가를 받아보려고 애를 많이 썼다. 내가 나이보다 몸이 성숙하여 양아버지는 나이를 늘려 이야기했지만 관에서는 실제 나이가 열일곱 살이라 안 된다고 했다.

국내에서 우리를 데리고 영업할 수 없었던 양아버지는 중국에 가면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 집에서 함께 기생수업을 받았던 언니와 나는 양아버지를 따라 중국으로 가게 되었다. 그때가 1941년, 내가 열일곱 살 나던 해였다. 양아버지는 중국으로 떠나기 전에 어머니에게 연락을 하여 중국으로 가는 것을 허락받았다. 떠나는 날 어머니는 노란 스웨터를 사가지고 평양역까지 나와서 배웅해 주었다.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증언집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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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신문 기사와 정대협 증언집을 종합하면 김학순씨는 13세에 어머니가 양아버지(실상 인신매매범)에게 40원에 팔고 양아버지는 3년간의 기생교육을 시킨 다음 국내에서 영업을 하려고 했으나 나이제한(19세)에 걸려 중국으로 끌고간다.

윤미향(정의기억연대 대표, 정의기억연대 영상 캡쳐)
윤미향(정의기억연대 대표, 정의기억연대 영상 캡쳐)

 

<질문>

1) 김학순씨의 어머니가 양아버지에게 팔지 않고 양아버지가 영업을 위해 중국으로 끌고 가지 않았다면 일본군 위안부가 되었을까?

2) 양아버지가 중국으로 끌고 가지 않고 국내에서 영업을 했다면 기생권번을 졸업한 김학순씨가 매춘업과 전혀 상관없는 직업을 가졌을까?

3) 김학순씨가 피해자라면 가해자는 어머니와 양아버지이다. 일본군은 소정의 돈을 내고 성을 매수한 것인데 어째서 일본군 성노예이고 피해자인가?

국사교과서연구소장 김병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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