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07 22:52 (일)
[光明時待의 마중물] 라면
[光明時待의 마중물] 라면
  • 프리덤뉴스
  • 승인 2021.03.3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라면


 光明時待 

"큰애야, 이 일을 어쩌냐. 느 아부지가 부도를 맞었단다."
모처럼 안부 전화를 드렸는데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어머니는 맥 풀린 목소리로 전하셨다.
'이게 무슨 소린가' 그간 사정이 악화되고 있음을 모른 것은 아니나 정작 부도라는 말이 뒤통수를 칠 줄은 꿈에서조차 생각해보질 못했는데.
부랴부랴 내려간 시골집에서는 별스런 광경이 연출되고 있었다.

물건마다 붙어있는 빨간 종잇장, 이름하여 차압 딱지라는 것이 사방에서 도깨비처럼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어린 동생들은 그간 어떤 말 못할 일을 겪었는지 잔뜩 주눅이 들어 있다가 나를 보자 벌떼처럼 우르르 달려들었다. 동생들이 내가 사 들고 간 통닭 봉지를 발기발기 찢어놓고 게걸스럽게 먹는 모습을 어머니와 나는 쳐다보고만 있었다.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시며, 나는 놀라고 얼떨떨한 표정으로. 세상에! 동생들이 절간에서나 봄직한 夜叉(야차)들처럼 아귀아귀 통닭을 뜯어먹는 모습이 끔찍하다는 느낌을 주었다. 

내가 내려갈 때까지 이틀, 이틀을 그 어린것들이 굶었다고 했다.
그러니 먹을 것을 보고 환장할 수밖에. 좀 드시라고 어머니께 살 한 점 띠어 드릴 만한 시간적 여유도 없이 통닭은 온데간데 없고 뼈만 앙상하게 드러나 있는데 그 뼈까지 오도독 씹어 골을 파먹는 막내를 보고 그제서야 나는 현실을 깨달으며 울고 말았다.

통닭 뼈를 물렁뼈는 물론이요 그 속의 골은 죽어도 못 먹는다던 막내가 물렁뼈도 뚝딱 먹어치우고 젓가락을 들고 뼈속을 쑤셔대며 핥아먹는데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본 것만 같고 욕지기가 나서 견딜 수 없었다.

전세금까지 차압 붙었다 했다. 하지만 기간이 남아서 돌려받을 때까지는 그 집에 살 수 있다고 했다.

아버지께서 없는 우리 집은 텅 빈 것처럼 느껴졌다.

어머니는 내게 기막힌 저간의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부도가 터졌다는 은행의 연락, 재차 걸려온 다른 은행의 전화, 아버지를 찾는 채권단들의 숱한 방문과 그들의 횡포, 부부만의 은밀한 안방에 벌렁 드러누워 돈 내놓으라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는 사채업자, 동생들의 놀램과 공포, 끼니를 잇기가 어려워지자 친척들과 돈을 꿔 갔던 사람들을 두루 찾아봤지만 모두 냉대하더란 말씀, 아버지께 은혜를 입었던 사람들이 행여나 자신들이 다칠까 저어하여 근처에도 얼씬하지 말라고 당부를 하더란 말씀, 그리고 이틀 전에 마지막 양식이 떨어져 아이들이 굶고 있다는 말씀까지 마지막으로 하시곤 서럽게 우셨다.

내가 안부 전화를 드렸다가 이 기막힌 소식을 들은 후로 전화도 끊긴 상태였다.

그야말로 암흑에 내던져진 가족들을 보면서 아직은 학생 신분인 나는 이제 무얼 할 것인가 심각한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장학금으로 학교에 다니며 아르바이트로 적은 돈을 벌기는 했으나 내 용돈 감당하고 나면 겨우 집에 내려갈 때 간식 정도 사 들고 가는 수준이었으니 이제 그것으론 어림도 없었다.

용단을 내려야 했다. 살림만 알고 살아오신 병약한 어머니와 올망졸망한 어린 동생들의 앞날이 내 손에 달려 있었다.

그 날 밤 그렇게 어수선한 집에서 복잡한 심경으로 머릿속엔 앞일을 대처할 청사진을 그리느라 하얗게 밤을 새웠다.

다음 날, 교통비를 제외한 내 수중에 있던 돈을 모두 어머니께 드리고 상경했다.

교수님을 찾아가 사정을 말하고 휴학을 했다. 그리고 직장을 알아보던 중, 시골에서 바로 밑 아우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어머니가 무척 아프시다 하며 누나가 내려와야겠다고 했다. 

어머니는 그간 너무 엄청난 일을 겪은 후유증을 앓고 계셨다. 내가 드리고 온 돈은 며칠이 못 가 넷이나 되는 자식들 입으로 학비로 죄다 들어가 버렸고, 빚쟁이들이 혹시나 달라붙을까 봐 몇 번씩이나 어머니를 문전 박대한 큰집에 자존심 다 죽이고 찾아갔던 날, 점심식사 중이던 큰어머니가 배고픈 어머니를 앉혀놓고 함께 밥 먹자 말 한마디 없이 다시는 찾아와서 귀찮게 굴지 말라고 했다며 그 자리에서 혀를 깨물고 죽고 싶었다고 어머니가 말했을 때 그만 분노가 치밀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큰집으로 달려가고 말았다. 

"놀부 마누라가 누군가 했더니 큰어머니이셨군요.

우리 아버지 사업 잘 될 적에는 사흘이 멀다 하고 찾아와 손 내미시더니 이제 이런 상황이 되니 그렇게 안면몰수하시고 어머니를 박대하셨어요? 세월은 흐르고 우리 집도 곧 일어납니다. 저도 있고 동생이 넷이나 있어요. 아시겠어요? 우리 어머니 재산은 다섯이나 되는 자식이라고요. 나중에 우리 얼굴을 어떻게 대하시려고 그리 박정하게 대하세요? 아는 척하지도 말고 귀찮게 하지 말라고 했다니 차후로 인연 끊는 걸로 알겠어요. 다시는 보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입에서 나오는 대로 쏘아붙이고는 사촌을 불러 전에 내가 꿔준 돈 죄다 계산해서 내놓으라고 바락바락 소릴 질렀다.

큰집에서 뛰쳐나왔을 때 내 손에는 사촌에게서 받은 십 이만 원이 쥐어져 있었고. 사촌은 뒤따라오며 '누나 너무 화내지 마. 우리 엄마가 원래 좀 모질잖아.'라고 말하는 걸 듣는 둥 마는 둥 뒤도 돌아보지 않고 휑하니 집으로 돌아와 버렸다. 

서울에서 아르바이트하던 여의도의 야끼도리 음식점 사장님이 주신 약간의 위로금과 교수님이 교통비나 하라고 주신 돈과 사촌에게서 받은 돈을 합하니 적잖이 큰돈이 되었다.

그걸로 당분간 가족들이 살아갈 밑천을 삼기로 하고 어머니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시던 날 나는 다시 상경했다.

직장을 알아봐 달라 부탁해둔 사람들에게 연락을 취하고 입사 시험을 보고 면접을 거치면서 바쁘게 지내는 동안, 나는 거의 먹지를 못했다.

하루에 라면 한 개. 라면은 네 조각으로 나누어 하루 네 번을 먹었다. 한 번에 다 먹고 종일 굶는 것보다 조금씩 네 번을 먹으니 견딜만했다.

중간중간에 물로 배를 채우고, 어느 날은 여전히 학교에 다니며 싱싱한 그들만의 시간에 생이 즐거운 친구들을 찾아가 얻어먹은 커피 한 잔으로 하루를 나기도 하고, 친했던 친구가 자기 집에서 퍼 온 것들을 고마워하며 고픈 배를 채우기도 하면서 이십여 일을 지낸 어느 날.

어머니가 또 쓰러지셨다는 연락이 왔다. 동생이 수신자 부담으로 전화한 걸 보니 그새 돈이 다 떨어진 모양이었다.

주인집 눈치가 보여 나더러 어찌하라고 그러냐고 낮은 소리로 이를 악물고 괜히 동생에게 퍼부어대고는 전화를 끊고 코딱지만 한 자취방에 돌아와 펑펑 울었다.

힘들었다.

피곤했다.

배도 고팠다.

앞날이 까마득했다.

벌렁 드러누워 멀거니 천정도 보다가 엎드려 베개에 얼굴을 묻고 몸부림도 치다가 결국 옷을 걸쳐 입고 집을 나섰다. 

자존심 상해서 붉어진 얼굴로 다른 학교 같은 동아리에서 만난 부자 선배에게 손을 내밀었다. 영문도 묻지 않고 선뜻 50만 원이라는 거금을 마련해 준 그 오빠는 내게 무슨 일이든 끝이 있는 법이라며 힘내라고 했다. 구세주였다.

"그 돈을 벌써 다 썼어? 도대체 어떻게 썼기에 벌써 또 굶는다는 소리가 나와? 나는 뭐 돈이 샘솟는 항아리라도 가지고 다니는 줄 알아? 정말 미치겠어." 집에 도착하자마자 가방을 냅다 던지며 소리부터 버럭 질렀다.

그런 후에 집안을 둘러보았는데 동생들이 둥그런 큰 자개 상에 둘러앉아 뭔가를 먹는 중이었다.

예전에 잘 살던 때 그 자개 상에는 맛있는 음식이 가득했건만 커다란 양푼 하나에 담긴 무언가를 먹던 동생들이 흠칫 놀라서 입들을 닫고 있었다.

까이 다가가 보니 그것은 하얗게 백태가 앉은 묵은김치였다.

배가 고팠던 동생들은 그나마 먹을 것이라고 남은 해묵은 김치를 백태도 벗기지 않은 채 손으로 찢어 먹고 있던 것이었다.

"이런 것 먹으면 어떡해? 탈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아무리 배가 고파도 먹을 게 따로 있지, 엄마는 어디 가셨어?" 짜증이 몰려와 소리를 질러대니 막내가 앙- 하고 울어버렸다.

어머니는 돈을 빌리러 가셨다 했다. 자식들이 자꾸 굶으니 어디 가서 일이라도 해봄 직하건만 이 바닥에서 무얼 한들 빚쟁이 손에 넘어가지 않으랴.

내 새끼 입에 들어가기도 전에 달아나 버릴 그런 돈 아픈 몸으로 벌어서 무엇하냐며 버티시던 어머니는 차라리 구걸을 택하신 것이었다.

라면을 사 왔다.

아예 한 박스를 사다 놓았다.

그리고 쌀도 한 말 사 왔다.

밥을 안쳐놓고 묵은김치는 말끔히 빨아서 쫑쫑 썰어서 볶아놓고 라면을 끓였다.

아예 커다란 스텐레스 양푼에다 물도 넉넉히 잡아서 실컷 먹으라고 라면을 열 개나 끓였다.

밥물이 부글부글 끓어 넘치며 구수한 냄새를 풍기자 막내가 '야! 밥이다, 밥이다!'라고 소리치며 뛰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뚝뚝 떨어져서는 라면 끓이는 물속으로 들어갔다. 

그림 金明敍 作
그림 金明敍 作

 

밥과 볶은 김치와 라면이 상에 올려지자 동생들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밥도 라면도 뜨거웠는데 후후 불지도 않고 사정없이 입에 퍼 넣었다.

어린 막내는 김치볶음을 얹어 밥을 떠주니 따복따복 받아먹으며 '맛있다'를 연발했다.

간간이 라면을 찬을 삼아 주면 '언니 더, 언니 더!'를 외치며 많이 달라고 했다.

아버지가 그리웠다.

우리가 이렇게 주리고 고생하는 동안 아버지는 어디서 끼니라도 때우고 계시는지. 아버지 없는 빈자리가 너무 큼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런데 밥을 먹고 난 아이들이 난리가 났다.

뜨거운 것을 급하게 먹느라 어느 녀석은 입천장을 데어 홀라당 벗겨지고, 어느 녀석은 혓바닥 쓰리다고 아주 혀를 내밀고 있고, 또 다른 놈은 맵고 뜨거운 국물을 양푼째 들고 들이켜다가 사레가 들려서 켁켁거리고,

그야말로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시끄러운 저녁 식사를 끝낼 무렵 어머니가 돌아오셨다. 

돈은 빌리지도 못하고 모기에게 보시만 했다 하시며 모기에게 물린 자리를 벅벅 긁으시면서 피도 별로 없을 텐데 모기는 양심도 없는 모양이라고 혼잣말을 하셨다.

모기 물린 자리가 벌겋게 부어오르고 있었다. 거의 도배를 하다시피 온몸을, 심지어 얼굴까지도 물리셨다. 물파스를 발라드리며 내심 어머니를 안아보고 싶었다.

내가 힘들다고 내질렀던 소리를 어머니가 듣지 못하신 것이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곱디고운 내 어머니가 동냥을 구하러 다니신 생각을 하니 가슴이 쓰리고 마음이 저리게 아파 왔다.

그 사이 어머니는 할머니가 되셨다. 스트레스 때문에 머리가 하얗게 세 버리신 것이다.

어머니의 뽑을 수도 없이 많아진 흰머리를 보면서 어떻게든 이 난관을 극복하고 집안을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한다는 책임감이 엄습해왔다.

다음날 나는 굳은 결심을 다잡고 서울행 버스에 타고 있었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
우리 다섯 자녀는 이제 나름대로 각자의 가정을 꾸리고 살고 있고, 아버지도 돌아오셨고 어머니도 이젠 한 시름 더셨다.

그러나 지나온 세월의 무게 때문인지 비쩍 마른 병든 몸으로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고 계시는 두 분을 보면 무어라 표현할 수 없이 마음이 아프다.

내 나이 벌써 그 당시 어머니의 나이를 넘긴 지 오래고 보니 한창의 나이에 어린 자식들과 세상에 덜렁 내던져진 어머니의 막막함을 가히 짐작하고도 남겠다.

라면, 요새는 라면이 기호식품이 되었다.

오히려 쌀값이 라면값보다 싼 세상이 되었다.
그러나 그처럼 배고프고 고달픈 삶을 사는 사람이 요즘도 드물지 않게 있어, 남들이 기호식품이라며 그저 라면이 아닌 무슨 라면이라는 식으로 업그레이드된 라면을 찾고 골라서 먹는 동안, 예전에 라면 한 개를 네 조각 내어 하루를 나눠 먹어야 했던 나나, 라면 한 개라도 허겁지겁 입천장 데어가며 혓바닥 벗겨져 가며 사레들려가며 내 동생들처럼 먹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이 희망을 품고 라면 국물을 마셔주기를 바란다.

삶에 찌들어 한탄하면서 마지못해 먹는 라면이 아니라 장차 기호식품으로 라면을 먹을 수 있기를 바라며 작은 소망이라도 국물에 섞어 마셔주기를 바란다.

더러는 라면이 꼴도 보기 싫어 먹는 것조차 거부할 수 있을 만큼의 계단 위의 삶의 향상을 꿈꾸며 맛있게 먹어주기를 진심을 담아 기도해본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