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07 22:52 (일)
[한가시리즈 35] 4.7 보궐선거, 주인이냐 노예냐
[한가시리즈 35] 4.7 보궐선거, 주인이냐 노예냐
  • 프리덤뉴스
  • 승인 2021.04.0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가 시리즈-35]

4.7 보궐선거의 역사적 의미 (2) 주인이냐 노예냐 ?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1946년부터 1대 김형민 2대 윤보선 3~4대 이기붕 관선 시장을 거쳐 1995년 30대 조순 민선 시장 이후37대 박원순 시장까지 75년 간 32명의 시장이 거쳐 갔다. 

평균 재임 기간이 2.3년이다.

박원순 시장이 약 10년으로 최장 그리고 26대 김상철 시장이 약 1주일 최단명 시장이다.

서울특별시장의 경우 다른 광역자치단체 수장들이 차관급으로 대우받는 데 비하여 유일하게 장관급으로 대우받아 정치적 비중도 크다.

조선 왕조 시절도 마찬가지로 타 관찰사가 참판(參判:차관)급 대우를 받았지만 한성판윤의 경우는 판서(判書:장관)급 대우를 받았다. 

뿐만 아니라 한성 판윤의 경우는 지역의 경찰 검찰 기능과 사법 기능까지 겸비한 무소불위의 자리였다.

그러나 한성판윤이 과연 역사적으로 그 위상에 걸맞은 지방 행정의 수장이었는가?

태조 이성계가 개경(開京)에서 한양(漢陽)으로 천도한 1394년 이후 627년이 지난 2021년 현재까지 한성판윤(漢城判尹), 일제 강점기 경성부윤(京城府尹) 그리고 대한민국의 서울 시장(市長)을 모두 합치면 이번 38대 서울시장은 몇 번째 시장일까?

놀라지 마세요! 200번째도 아니고 물경 2011번 째 시장이 된다

공교롭게도 숫자의 놀음인지 2005년에 당선된 이명박 시장이 2005번째였다.

일제 강점기와 해방 후 모두 평균 2년 이상 재임했으나 조선시대만 보면 515년 동안 1,961명이 거쳐 갔으니 평균 재임 기간이 3 달이었다.

통계상 10명도 아니고 약 2천 명이 3달 재임이라면 부하 이름 외우기도 업무 파악도 하기 힘든 기간이니 이게 인사 행정이라기보다는 나라꼴이 말이 아닌 시절 백성들이 얼마나 고된 삶이었는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이렇게 우리 피 속에 연연히 흐르고 있는 벼슬 선호의식의 DNA를 가진 우리들이 과연 조선시대와 얼마나 달라졌나?

지금은 민선이지만 이번 보선 선거 양상을 보면 세월이 달라졌고 물질이 풍요로워졌지만 백성을 무시한 권력의 야욕은 조금도 변함이 없다.

젊은이들에게 입맛에 맞게 통신비를 ,사업 자금 대출을 자기 돈으로 일본 아파트라도 팔아서 주겠다는 것도 아니고 시민들 주머니를 털어 자기 집권을 위해 뿌리겠다는가 하면, 몇 십조 원이 들어가는 가덕도 공항을 짓겠다고 시민들에게 미끼를 던지는 것도 과거 조선시대 백성들로부터 가렴주구(苛斂誅求)한 돈으로 매관매직한 것과 하나도 변한 것이 없다.

지난 3월 29일 종로 YMCA에서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 1850~1927) 선생  94주기 추모식이 열렸다.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 1850~1927) 선생 94주기 추모식

월남의 일화가 많지만 매관매직에 관한 일화는 목숨을 건 사건이었다.

 

아관파천 당시 이상재 선생이 참찬 [參贊:정 2품]이라는 벼슬자리에 있을 때 고종을 뵈려고 러시야 공관으로 갔는데 궁녀들이 자주 빛 보자기로 곱게 싼 벼슬을 사고파는 첩지 보따리를 고종 앞에 갖다 놓는 것을 보고 이상재 선생은 아주 천연스럽게 “임금님이 계신 방이 어찌 이리도 추운고!” 하시면서 슬쩍 그 보따리를 집어 벽난로에 쳐 넣었다.

그리고는 땅에 엎드려 임금님께 머리를 조아리고 대죄에 용서를 빌었더니 고종도 선생의 충성을 가상히 여겨 이를 불문에 붙이기로 하였다.

선생이 밖으로 나오시다가 궁녀들을 향해 “이년들아! 나라가 이지경이 되었는데도 외국 공관까지 와서 폐하를 욕되게 하느냐” 라고 큰 소리로 꾸짖었다고 한다.

월남과 우남. 맨 좌측이 우남 그리고 우측 2번째가 월남

 

지금 이 나라에는 이러한 기개(氣槪)를 가진 선비가 아쉬운데 고영주, 윤석열, 최재형 같은 투사가 있다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우연한 기회에 숙종 때 강현(姜鋧)(1650∼1733)이라는 판윤이 7번이나 한성판윤을 지냈으며 총 재임기간을 합산해도 2년 2개월로 평균 4달도 안 되었다는 기네스북에 오를만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성판윤에 관해 이런 기가 막히는 사실을 접하고 조선왕조실록 등 인터넷 검색으로 일일이 카운터 하기 시작하여 515년 동안 1,961명이라는 경악할 만한 사실을 발견하였다.

강현이 처음 판윤이 된 때가 565代였고 마지막 7번째가 645代로 그동안80명이 거쳐 갔다는 놀라운 사실이다.

강현

 

제일 短命한 판윤은 高宗 光武 8년(1904)에 이병성(8/2~8/3), 성광호(8/3~8/4)로 하루 이틀 하루살이 판윤을 지냈고 이들을 포함하여 한 해에13명의 판윤이 거쳐 갔으니 월남이 첩지 보따리를 불태운 사연을 짐작할 만하다.

19세기 초에 서양은 산업혁명의 여세로 국력을 키워 아프리카, 인도를 거쳐 동진정책으로 아세아로 힘을 뻗치고 문호개방을 강요하고 있는데, 당시 순조(1800~1834) 재위 34년에 220명,고종(1864~1907)재위 43년에 414명으로 평균 수명이 각각 56일, 38일이었으니 밖으로 거대한 해일이 밀어닥치고 있는데, 집안 사정이 매관매직으로 이 모양이었으니 나라가 온전할 수 없었든 것이다.

정조의 의문사로 둘째 아들인 순조가 11살에 등극을 하니,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했고, 5년 뒤 친정 체제로 돌아왔으나 부원군 김조순의 안동김씨 세도 하에서 매관매직이 성행하였던 결과였다. 

결국은 견디다 못한 농민들이 봉기하여 홍경래의 난을 일으킨 것이다.

그러나 조선왕조 초기, 즉 태조부터 세조까지(1395~1466)까지 71년 집권동안 107명의 판윤이 거쳐 가서 평균 8개월 이상, 조선조 말과 비교하면 6배가량 장수한 셈이다.

특히 선정을 베푼 세종 때와 왕권을 강화한 세조 때에 재임기간이 길었고, 이때 조선왕조 역사상 최장수 저헌(樗軒) 이석형(李石亨)이 3년 3개월 기록을 수립하기도 하였다. 

저헌(樗軒)의 조부는 이종무(李宗茂)이다. 

이종무는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는 데 일조해 개국 공신에 책훈된 인물로 세종 때 대마도를 정벌했다.

경기도 용인 수지 고기리의 이종무 묘소

'최악의 한성판윤'은 혼군 고종 때 김홍륙(金鴻陸)으로 그는 함경도 사람으로 조실부모하고 이리저리 떠돌다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어부 생활을 하면서 러시아어를 익혔다. 

그는 1895년에 이범진이 러시아 공사 베베르와 조로통상조약(朝露通商條約)을 체결할 때 러시아어 통역관이 돼 출세의 기회를 잡았다. 

김홍륙은 1896년 아관파천 시절에는 비서원 승(祕書院 丞)으로 근무하면서 고종의 전담 통역관이 됐다.(출처 : 천지일보)

 

1898년 3월에  김홍륙은 한성부 판윤에 임용되어 고종의 총애와 러시아의 세력을 배경으로 권력을 남용하고 뇌물을 탐해 의도적으로 통역을 오역했다는 죄목으로 기소되어 고종이 흑산도로 귀양을 보냈다.

이에 앙심을 품고 김홍륙은 흑산도로 떠나는 날에 궁중의 몇몇 사람을 비밀리에 포섭하여  고종이 좋아하는 커피에 아편을 놓아 고종 독살 음모를 했다. 

그는 결국 고종과 세자를 독살하고자 한 대역죄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김홍륙을 경호하는 경찰. 언덕 위에 러시아 공관이 보인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반복되듯이 막강한 권력의 박원순과 오거돈이 고종 대신 문제인에게 성추행이라는 불명예를 커피 잔에 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셈이다.

앞서 “市長은 기둥에 똥칠을 할 수 있지만 기둥뿌리를 뽑지는 못한다." "코로나 바이러스나 외적으로부터 성문을 지키느냐 열어젖히느냐 하는 것은 국가통수권자입니다.”라고 얘기한 사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내일 모레면 시장 보궐 선거일이다.

코로나로 어려운 삶을 살아가는 시민들이 낸 혈세 800여 억원을 성추행 때문에 치러지는 선거에 써야 하는 이 비참한 현실 앞에 일말의 죄책감도 없이 시장 자리를 지키겠다는 것은 주권재민의 국민들을 개돼지로 우롱하는 정권이다.

주인이냐 노예냐 의 선택의 장이다.

우리 모두 선거일에 만사 제치고 투표장으로 가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