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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도 일제강제동원 피해 진상조사 학술연구용역 보고서[1]
2019년도 일제강제동원 피해 진상조사 학술연구용역 보고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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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2.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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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광산에 동원된 조선인 광부의 경험 세계

사도광산에 동원된 조선인 광부의 경험 세계

1) 천옥돌의 경우 


1916년 7월 경남 남해에서 태어난 천옥돌은 열여덟 살인 1934년 10월 고향에서 결혼했다. 남편의 나이는 서른셋이었는데, 젊었을 때부터 규슈 탄광을 비롯해 이곳저곳을 다니며 일을 하던 일반도일자였다. 

결혼을 위해 일시귀국을 한 남편이 결혼한 이듬해 혼자 일본으로 가버리자 천옥돌은 1936년 6월 생후 5개월 된 아들을 업고 시모노세키를 거쳐 사도섬으로 왔다.

일본말을 전혀 할 줄 몰랐기에 물을 마시고 싶어도 마실 수 없었고, 배가 고파도 먹을 수 없는 고생을 하며 간신히 도착했다. 

남편은 시누이 부부와 함께 사도섬에서 아이들을 상대로 얼음과자를 만들어 팔고 있었다.

설탕을 물에 녹여 눈을 조금 섞고 소금을 넣어 병에 얼린 것이었다.

천옥돌은 아이를 업고 손수레에 얼음과자 100개를 싣고 하루 종일 행상을 했다.

아침부터 밤까지 일하는 생활이었다. 

그래도 조선에서 사는 것 보다 경제적으로 나았으므로 1939년에 고향에 있는 여동생과 남동생을 불러들였고, 2년 후에는 어머니와 친척도 불렀다. 비록 전쟁시절이었지만 가족 친지가 모여 살았다. 

“전쟁 중에 육지에는 먹을 것이 없었지만 사도에서는 열심히만 일하면 먹는 것을 걱정할 필요는 없었어요.” 

패색이 짙어지자 B-29가 사도 하늘까지 날아와 섬사람들은 겁에 질리기도 했으나 직접적인 피해는 없었다. 

천옥돌은 1936년 사도섬에 들어간 이후 2년간 고향에서 산 것을 제외하면, 한 발자국도 섬을 나간 적이 없었다.

해방 후에는 조선 엿을 팔거나 고무신 수리, 폐품 수집 등을 하며 여덟 명의 아이들을 키우고 살았다.

그녀에게 사도는 “일이 없어도 살기가 좋은” “마음이 편한 곳”이다.

이같이 천옥돌이 평생 사도섬을 고향 이상으로 여기며 살 수 있었던 것은 강제동원과 무관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_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일본지역 탄광·광산 조선인 강제동원 실태 - 미쓰비시 광업(주) 사도광산을 중심으로’ / 정혜경 

[보고서 전문] http://historicaltruth.net/bbs/board.php?bo_table=31&wr_id=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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